성추행
May 9, 2015 | by B2B Missions
[B2BM칼럼] 막살면 안되는 그리스도인

어제 오늘 포털사이트 검색어에서 상위권에서 사라지지 않는 한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대형교회 목사’라는 말입니다. 그분이 왜 포털사이트의 검색어 상위 순위에 올랐는지는 모두가 아는 사실이기 때문에 재론하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가뜩이나 비난을 받고 있는 우리 기독교가 다시한번 좋지 않은 일로 도마위에 오르고 많은 사람들이 이로 인해 힘들어질 것은 자명한 일 같습니다. 일반인들이 구설수에 오르면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칠 수 있는데 유독 개신교 목사, 장로 등과 관련되어 말이 나면 수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는 것은 그만큼 기독교 지도자들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높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왜 사랑의 종교인 기독교가 이토록 처참하게 욕을 먹게 되었을까요? 필자는 그 원인이 우리의 복음 설명방식에 있다고 생각을 하고 그 대안을 찾아 보았습니다.

막살아도 되나요?

“막살아도 되나요?” 그리스도의 온전한 구속을 전하면 가끔 듣는 질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과거의 죄, 현재의 죄, 미래의 죄까지 용서했다는 온전한 복음에 대한 반론이지요. 예수님이 어차피 용서했고, 천국행 열차는 이미 확보를 했으며 그곳도 취소불능이라니 이 복음을 들은 사람들은 ‘어 이제 막살아도 되네!’라는 생각을 가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실 사도바울도 복음을 전하고 이런 말을 들은 것 같습니다. 그의 편지 중 복음을 가장 체계적으로 설명하고 있다는 로마서에서 그는 적어도 이 문제에 대해 두번이나 공격을 받았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가 받은 첫번째 공격은 로마서 3장에 나옵니다.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여 그의 영광이 되었다면 어찌 내가 죄인처럼 심판을 받으리요 또는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 어떤 이들이 이렇게 비방하여 우리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하니…”(롬3:7~8).

이 말씀에는 두가지 공격논리가 들어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선은 인간들의 악이 존재함으로 드러난다는 논리에 입각한 공격입니다. 다른 말로 인간들이 악을 행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선도 드러날 수 없다는 논리입니다.  악을 행해 하나님의 선을 더더욱 드러나게 하는 것이 인간들이므로 인간들이 악을 행하는 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이 된다는 말이지요. 그럴듯한 주장입니다. 예를들어, 학교에서성적이 1등인 학생은 공부 못하는 학생이 있기 때문에 그 1등이 빛나는 것이지 모두가 같은 100점을 받는다면 1등학생이 위대하게 보일리가 없다는 논리와 마찬가지입니다. 둘째, 그렇기 때문에 바울이 전한 복음은 하나님의 선을 이루기 위해서는 인간들이 악을 행하자고 한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인간들이 막살아줘야 하나님의 심판도 의미가 있고 더더군다나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의 의미가 빛난다는 것이지요. 그럴듯한 논리입니다.

사도바울이 받은 두번째 공격은 로마서 6장에 나옵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헤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가운데 더 살리요” (롬6:1~2).

이 공격은 “율법이 들어 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나니” (롬 5:20)라는 사도바울의 ‘율법으로부터의 자유,’ ‘그리스도안에서의 온전한 은혜’라는 선언에 대한 비아냥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하심으로 믿는 모든 사람들의 죄를 대속하셨고, 다시는 죄를 위한 제사가 필요없기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의지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은혜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자 율법을 철저하게 지켜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믿은 율법주의자들이 사도바울을 공격한 것입니다.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사도바울의 이 수사적 질문은 “그렇다면 우리가 죄를 지으면 지을 수록 은혜가 많아지니 계속해서 죄를 짓는 것이 하나님에게 좋은 것 아니냐?”라는 비아냥 섞인 질문에 대한 답입니다. 사도바울의 대답은 아주 간단합니다. “그럴 수 없느니라.” 이 말의 의미는 우리가 죄를 지어서는 안된다는 도덕적인 의미가 아니라 진정으로 그리스도의 은혜를 깨달은 사람들은 그래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 길로 가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어떻게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를 개달은 사람이 막살게 되겠느냐? 그건 말도 안된다!”라는 대답이지요.

율법이냐? 은혜냐?

사도바울이 받은 공격은 사도바울이 은혜의 복음으로 율법을 폐지하려 한다고 공격하는 유대주의자들로부터였습니다. 그러니까 “막살아도되나요?”라는 질문을 하였던 사람들은 죄를 밥먹듯이 짓고 살다가 복음을 듣고 ‘아 이제 해방이다. 예수님이 내죄를 담당했으니 이제 안심하고 계속해서 죄를 짓자!’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동안 하나님의 심판이 두려워서 율법을 온전히 지켜 스스로 의로와지려고 하고, 또한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던 사람들이 던진 질문입니다. 그들의 내면에는 ‘나처럼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따르던 사람들이 하나님께 칭찬을 받고 구원을 받아야지 저렇게 막굴러 먹던 인간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하나로 용서받는다는 논리는 말도 안되!’라는 생각이 가득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지켜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 있다는 생각을 하였고, 십자가의 은혜를 통해 죄용서를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말을 하는 사람들에 대해 율법파괴주의자들이라고 폄하하며 공격을 하였던 것입니다.

이에 대해 사도바울은 일관되게 “율법의 행위로는 그의 앞에 의롭다함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을 뿐”(롬3:20)이고, 율법은 우리의 죄를 알게 하는 것 (롬7:7)으로,율법이 없는 곳에서는 범법도 없다(롬 4:15)고 설명합니다. 이렇게 설명하는 이유는 율법을 폐기하려고 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율법이 우리의 연약함을 깨닫게 하고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의지할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하려는데 목적이 있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율법으로 모든 사람들 죄 아래 가두어 놓았으며 (갈3:22), 죄인들은 믿음이 계시될 때까지 그 안에 갇혀 있다가 (갈3:23)믿음이 계시되면 그 율법이 죄인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역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갈3:24). 그렇기 때문에 율법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한 것입니다 (롬7:12).  그런의미에서 율법은 구원에 있어 필수이며 복음의 일부분입니다. 율법을 통해 죄인임을 깨닫고 그 죄로 인해 자신이 죽은 자라는 것을 깨닫게 된 자들만이 그리스도의 은혜의 의미를 알게되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율법은 우리가 구원을 얻는데 없어서는 안될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율법의 끝에서 율법의 완성이신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지 율법이 없이 그냥 사랑이신 그리스도를 만날 수 없습니다. 율법만이 우리를 그리스도께 인도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율법과 은혜는 대립적 개념이 아니고 보완적 개념입니다. 더 엄밀하게 말해 율법과 은혜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지요.

기독교가 욕을 먹는가?

기독교가 욕을 먹는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죄를 많이 짓기 때문이 아닙니다. 불교나 다른 종교도 대동소이 합니다. 하지만 기독교가 욕을 먹는 이유는 스스로가 세워야할 그 율법을 파기했기 때문이고 새상은 우리를 그리스도께 인도할 그 율법을 가지고 죄를 지은 그리스도인들을 공격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기독교 내부적으로도 죄를 설명하고 십자가를 설명하는 과정에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요즈음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은혜,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만이 강조됩니다. 하지만, 사랑과 은혜와 자유는 공짜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필자는 예수님의 희생을 폄하하고자 이런 이야기를 꺼낸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십자가 앞으로 나가는 과정을 말하여 십자가의 의미를 온전히 알게하기 위하여 이 글을 쓰는 것이지요. 어떤 이들은 예수님께 나갈 때 빈손으로 나아가 공짜로 구원을 얻는다고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단언컨데 ‘반쪽복음’입니다.  또 다른 이들은 우리가 행함으로 구원을 지켜내야 한다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것도 잘못된 율법주의 신앙입니다. 그렇다면 온전한 은혜의 복음은 무엇인가요? 저는 구원을 받는 과정에 그 해답이 있다고 봅니다.

현대 기독교는 너무도 쉽게 구원을 선포합니다. 거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복음을 그렇게 설명하지 않으셨습니다. 옥에 갇힌 세례요한이 사람을 보내어 예수님에게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까” (마11:3)라고 질문을 하자 예수님은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마11: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구원의 조건과 결과를 가장 잘 설명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보고 예수님을 온전히 알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이 눈이 멀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뒤를 따라 좁은 길로 걸어가려면 먼저 자신이 앉은뱅이어야 합니다. 진리를 알아 듣고 깨닫기 위해서는 먼저 그가 귀머거리여야 하고, 다시 살아나는 부활의 경험을 위해서는 자신이 죄로 인해 죽은 자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심령이 가난하지 않고 바리새인들처럼 자신의 의로 충만한 사람에게는 복음이 전파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어쩔 수 없이 은혜를 기다리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것이 율법입니다. 율법은 우리의 능력으로는 결코 스스로 의롭게 될 수 없다는 우리의 실존을 깨닫도록 합니다. 그런의미에서 이러한 율법의 가르침을 통과하지 않고 즉, 율법을 통해 자신의 연약함, 자신의 죄에 대한 철저한 성찰이 없이, 맹목적으로 십자가의 사랑만을 전해 들은 사람들은 ‘값싼 반쪽 구원’에 대한 소식을 들었을 뿐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죄를 가벽게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율법을 통해 치열한 자기 성찰을 거친 사람들은 다시 그자리로 돌아가려는 생각을 아예하지 않습니다. 물론 이런 분들도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죄를 지었을지라도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임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다시 철저한 회개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고백하게 됩니다. 하지만 ‘값싼 구원’을 통해 마냥 좋으신 하나님 만을 외치던 사람들에게 죄는 ‘그냥 예수님의 십자가에 의해 처리된 못된 습성’에 불과한 것입니다.

죄인들은 자기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죄인을 용서합니다. 하지만 그냥 아무런 과정이 없이 용서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율법을 통해 우리가 얼마나 수치스러운 존재인지를 깨닫게 하고 더 이상 낮아 질수 없을 정도로 형편없는 사람임을 깨닫게 함으로 은헤를 허락하십니다. 그것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용서의 원리입니다. 우리가 죄를 가볍게 넘긴다면, 율법의 심판이 없는 십자가의 사랑만 설파한다면,  기독교가 사회의 지탄으로부터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회개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철저하게 발가벗기는 치욕스러운 과정입니다. 그 과정을 부끄럽지만 받아들인 사람만이 십자가의 은혜가 가져다주는 그 희락을 맛볼 수 있고 무거운 죄짐을 내려 놓는 다는 것의 의미를 알게 됩니다 [B2B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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