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내
March 4, 2015 | by B2B Missions
제자훈련시리즈[3] 제2강: 건강하지 못한 영성 (거짓자아) — 첫번째
[정서적으로 건강한 영성]이라는 책을 쓰신 피터 스카지로 목사는 자신이 생각해온 목사라는 직분에 충실하기 위해 최선을 다 하다가 사랑하는 딸을 잃을 뻔 한 일을 그의 책에 적고 있습니다. 그의 이야기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는 자신의 교회를 방문한 한 부부를 집으로 초대하여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다가 딸아이가 수영장에 빠져 죽을 뻔한 아찔한 경험을 이야기 합니다. 스카지로 목사님 부부는 존 부부와 함께 주일 오후 교회 일과가 끝나고 늦은 점심을 하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존은 한번 말을 하면 쉴새없이 말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피터 목사는 그의 이야기를 최대한경청하려고 노력을 했습니다. 그의 말을 끊고 그만하자고 해야하는데 그것이 목사의 도리는 아닌 것 같아 계속해서 그의 말을 들었습니다. 속에서는 물론 부아가 치밀어 오르기도 했지만 이내 그런 생각과 속으로 화를 낸 것에 대해 회개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세살박이 딸 페이스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불안하기는 했지만 “뭐 별일있겠어?”라는 생각으로 존의 이야기를 들어 주었습니다. 피터 목사님의 부인은 아이 생각에 이미 대화는 건성으로 듣는 듯했고 마침내 아내가 아이를 찾아야 겠다고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피터 목사님의 세살박이 딸아이는 수영장에서 빠진 채 발견되었습니다. 그녀가 발견되었을 때에는 수영장 난간을 붙잡고 혼심의 힘을 다해 버티고 있었습니다. 조금만 늦었어도 피터 목사님은 사랑하는 딸을 잃을 뻔 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던저 보아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피터 목사님이 존을 대접한 것이나 존의 대화를 싫으면서도 끝까지 들어 준 것은 영적으로 성숙한 태도라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적당한 선에서 마무리를 짓는 것이 좋을까요? 존은 피터 목사님이 담임하는 교회의 교인이 아니고 일시적으로 교회를 방문한 사람입니다. 물론 그는 그 전에 한번 자신을 만난 적이 있지만 집에 초대를 할 정도로 친한 사이도 아니었지요. 그런데 그가 점심을 같이 하자고 했을 때 피터 목사나 사모님은 ‘훌륭한 목사’ ‘훌륭한 사모’ 노릇을 하여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점심식사에 그들을 초대했습니다. 과연 이들의 태도가 옳은 것일까요? 당신은 평신도로써 목사님이 자신의 이야기를 끝까지 경청하지 않고 적당한 선에서 끝내려 한다면 그 목사를 어떻게 판단하고 평가하겠습니까? 정작 당사지안 피터 목사님은 자신의 그러한 행동들에 대해 어떻게 말씀하고 있을까요? 이 사건을 회상하면서 피터 스카지로 목사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아내와 나는 왜 그렇게 오랫동안 어리석게 살았을까? …하나님과 나 자신에 대해 솔직하지 못하고 미성숙했던 과거를 생각하면 지금도 부끄럽다… 나는 겉으로 친절하고, 너그럽고, 참을성 많아 보이지만, 실상은 그런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나는 내면의 참 모습과는 상관없이 겉으로만 훌륭한 기독교인인 양 위장했다.”

사실 모두가 남들을 위식하여 자신의 내면의 진실을 속이는 일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엄청난 일을 겪고 나서야 자신의 내면을 돌아 봅니다. 무엇이 쉽습니까? 근사한 척하는 것이 쉬울까요? 아니면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을 솔직이 이야기 하는 것이 쉬울까요? 그리스도인들은 남들을 대할 때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을 숨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거짓모습으로 살고 있는 것이지요. 성경 한 곳 찾아 읽고 우리의 거짓자아에 대해 좀더 논의 하도록 하겠습니다. 에베소서 4장 21절~24절입니다.

21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과연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 진대 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23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엡 4:21~24).

무엇이 거짓됨인가?

진실됨은 무엇이고 거짓은 또 무엇인가? 이 질문에 답을 하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실을 왜곡하고 남을 속이고 하는 식의 거짓, 우리 모두가 초등학교 도덕시간에 배운 그런 거짓됨과 참됨을 성경에서 어른들에게 가르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리스도 안에 들어 가면 자신이 그동안 그토록 참으로 믿어 왔던 많은 것들이 ‘거짓’으로 드러나는 경우를 종종 경험합니다. 오늘 제가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도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인류 보편의 윤리, 사회가 지니고 있는 보편적 가치과 도덕이 있습니다. 그것은 당연히 지켜야 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이나 일반인들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굳이 성경을 읽지 않고 초등교육만 충실히 받아도 그런 것들은 다 알게 됩니다. 지금 기독교가 욕을 먹는 것도 바로 우리가 초등학교 시절에 배운 인간들의 기본윤리를 지키지 않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초등학생도 다 아는 그런 기초적인 윤리를 어른들인 성도들에게 교회에서 교육을 한다는 것 자체가 코메디입니다. 만약 교회 성인예배에서 ‘옆 사람의 물건을 훔치는 행위는 나쁜 행위입니다.’ (도적질 하지 말라!)라고 목사님이 가르치신다면  그것은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을 모독하는 것이나 마찬가지 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가르치지 않아도 이미 보편적으로 다 알고 있는 윤리이거든요.

하지만 윤리라는 것,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것은 그런 보편적 윤리로는 해석이 되지 않는 신비의 영역일 수 있습니다. 예를하나 들어 보지요. 어떤 자매님 한분이 백화점에 나갔다가 우연히 명품관 진열장에 있는 핸드백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그리스도인은 돈이 있더라도 검소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삶의 기준으로 생각하고 살았고 실제로 검소한 생활을 실천했습니다. 물론 다른 분들에게도 자신의 삶의 가치관을 이야기 했지요. 그런데 그날 핸드백을 보고는 너무 갖고 싶은 거예요. 하지만 그녀는 꾹 참았습니다. 그녀가 참은 이유는 경제적인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평소 자신의 소신을 지키려는 것이었죠. 물질의 유혹, 자신의 내면의 소리를 뿌리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냥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것과 같이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집에 돌아온 후 그 자매님은 가끔 그 가방 생각이 났지만 그래도 점점 그 핸드백이 주는 유혹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얼마 후 그는 교회 모임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모임에 참석한 다른 자매님이 바로 그 핸드백을 들고 온 것이었습니다. 자매님의 눈에는 그 핸드백만 보였습니다. 자리를 옮겨도 그렇고 차를 마셔도 그렇고…그러면서 그 자매님의 내면에서는 전쟁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한편에서는 핸드백을 들고 온 그 자매님을 정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저렇게 사치를 해도 되나?’하는 마음으로 그 핸드백 때문에 그 분의 신앙심을 깎아 내렸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도 그것을 갖고 싶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당연히 그것을 살 능력도 되는데 자신의 신앙적 소신, 더 엄격히 말하면 자신이 지금까지 지켜왔던 신앙의 틀을 깨는 것이 매우 두려웠고 세상사람들과 똑같은 사람으로 변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이 자매님의 경우 무엇이 자신의 참 모습이고 무엇이 자신의 거짓모습일까요? 신앙심을 지티는 소신 안가요? 핸드백을 갖고 싶어하는 마음인가요? 우리는 참과 거짓을 우리가 생각하는 도덕적 기준에 맞추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사도바울의 이야기를 들어 보기로 하지요. 앞에서 읽은 에베소서 4장 21절에서 24절입니다. 이를 헬라어 원어성경을 직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21절) 만약 사실 당신들이 그[예수]를 들었고 (εἴ γε αὐτὸν ἠκούσατε)

그리고 그에 의해 가르침을 받았으며 (καὶ ἐν αὐτῷ ἐδιδάχθητε,)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처럼 (καθώς ἐστιν ἀλήθεια ἐν τῷ Ἰησοῦ,)

(22절) [당신들은] 당신들을 벗어버렸습니다 (ἀποθέσθαι ὑμᾶς )

(=) 옛 행실들을 따르던 (κατὰ τὴν προτέραν ἀναστροφὴν)

(=) 그 옛사람을 τὸν παλαιὸν ἄνθρωπον

(=) 자신을 기만하는 욕망에 따라 파괴되고있는 (당신들을)

(τὸν φθειρόμενον κατὰ τὰς ἐπιθυμίας τῆς ἀπάτης,)

(23절) 당신들은 당신들의 마음 안에 있는 영에 의해 새롭게 되고 있습니다.

(ἀνανεοῦσθαι δὲ τῷ πνεύματι τοῦ νοὸς ὑμῶν)

(24절) 그리고 당신들은 새사람을 입었습니다 (καὶ ἐνδύσασθαι τὸν καινὸν ἄνθρωπον)

(=) 하나님을 따라 창조된 (τὸν κατὰ θεὸν κτισθέντα)

진리의 의와 거룩함에 의해 (ἐν δικαιοσύνῃ καὶ ὁσιότητι τῆς ἀληθείας.)

이 말씀의 요지는 이렇습니다. 사도바울은 지금까지 에베소 교인들을 가르쳐왔는데 그들이 가르침을 받은 것은 예수님 그 자체이고, 그 예수님에 의해 가르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에 의해 예수님에 대해 가르침을 받은 셈이지요. 그리고 그 가르친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는 순서대로 읽고 있으나 그것보다는 동사의 시제에 맞추어 행위의 순서를 정하는 것이 좀더 올바른 해석방법이라 생각합니다. 22절부터 23절은 다음과 같은 문장구조입니다. 간단하게 보면,

22절: 당신들은  옛사람을 벗어버렸습니다. (과거)

23절: 당신들은 지금 새롭게 되고 있습니다. (현재)

24절: 당신들은 새사람을 입었습니다. (과거)

그러니까 사도바울의 가르침은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옛사람을 벗어 버렸고 새사람을 입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새롭게 되어가고 있는 과정이라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우리에게 옛사람은 없어야 정상입니다. 늘 새사람만 나타나야지요. 그런데 왜 ‘옛사람’이라고 하는 것이 살아서 우리를 괴롭히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을 해결하는 것이 이번 훈련과정입니다. 그 이유를 깨닫고 우리들이 얼마나 말도 않되는 헛깨비같은 것에 홀려 살았는지 그리고 지금도 그러한 것들에 사로잡혀 살고 있는지를 말입니다.

사도바울은 우리의 옛사람을 다음과 같이 규정합니다. 옛 사람은 두 가지를 추구한다고 말합니다. 첫째로, ‘옛 행실들’을 따른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옛 행실’은 단순히 도덕적으로 타락된 모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해서 그것을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에게 온전히 맡기지 못하고 스스로 세운 원칙을 하나님께서 주신 원칙으로 알고 그것에 얽매어 사는 삶입니다. 이런 분들의 특징은 늘 뒤에서 불만이 많습니다. 물론 교회에서는 열심히 일을 하지만 일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나 쉬운 것만 찾아다니는 사람들을 속으로 부아가 치밀어 오릅니다. 집에 오면 여전히 세상의 가치관을 그대로 갖고 살면서도 그것을 억지로 외면하려 합니다. 자식이 좋은 학교 가야하고, 경제적으로 문제가 없어야 하며, 가족 모두가 건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중에 하나라도 결핍이 되면 못견뎌 하지요. 이럴 때 못견뎌 하는 그 행동들이 ‘옛 행실들’입니다. 이런 ‘옛 행실들’은 자기 내면에 있는 잘못된 욕구가 조종해서나오는 행실들입니다.

둘째로 사도바울은 “자신을 기만하는 욕망”이라고 말합니다. 우리 한글 성경에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로 되어 있습니다. 유혹이란 결국 ‘자기 스스로에게 자신이 속는 것’입니다. 자신의 욕망이 자신을 먼저 속입니다. 그 욕망은 외부로 나타날 때에는 매우 건전해 보이고 남들이 부러워할만 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자신을 파괴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잘 못하는 것이 ‘아니오’라는 말입니다. ‘배려’라는 단어하나 때문에 자신은 배려할 능력도 안되는데 남들을 배려합니다. 그래서 결국 자신을 파괴해서라도 남들에게 좀 더 좋게 보이려고 한다는 것이지요. 앞의 예에서 피터 스타지로 목사님이 그랬습니다. “이 정도 말씀하셨으면 다음 이야기는 나중에 기회를 잡아서 더 듣는 것이 어떨까요?” 또는 “지금까지 이야기를 들어 보니 당신의 말의 핵심은 이런 것 같은데 충분히 알아 듣겠습니다.” “주일 오후라 제가 피곤하니 조금 쉬는 것에 저에게는 좋을 듯합니다.” 등등 이런 말들을 목사가 성도에게 하면 안되는 것이고 나쁜 목사라는 생각, 그래서 남들에게 훌륭하고 근사한 목사라는 이미지를 계속해서 남기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요. 사도바울은 이러한 생각들이나 행동들을 ‘자기를 기만하는 욕망’이라고 말하며 그것은 결국 자신을 망가뜨리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입은 새 사람은 무엇일까요? 바울은 진리의 의와 거룩함에 의해 하나님을 따라 창조된 사람으로 정의합니다. 결국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아담의 모습입니다. 아담이 범죄하기 이전의 상태를 생각하면 됩니다. 그는 무엇이든 할 수 있었고 어떤 것도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동산을 벌거벗고 다녀도 부끄러움이 없었지요. 행위의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도 스스로 내리지 않았지요. 그런데 그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은 후 변했습니다. 스스로가 도덕적 판단을 내린 것이지요. 그리고 나서 한 일이 바로 자신을 가리는 일과 숨는 일이었습니다. 나뭇잎으로 가린 그를 생각해 보십시오. 무엇이 진짜 그의 모습입니까?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바로 그 모습, 벌거벗은 것이 그의 진짜 모습입니다. 물론 밖으로 보이는 손수 지어 입은 그 옷은 그의 거짓된 모습인 것이죠.

그런데 우리는 착각을 합니다. 잘 교육된, 훈련된 그것이 나의 본 모습인 냥 착각을 하지요. 그래서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의 권력이 자신의 일부로 착각을 하고 돈을 가진 사람은 돈뒤에 자신을 숨지요. 명예를 얻은 사람들은 그 명예로 자신을 치장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본질, 내면은 보지 않고 그 권력과 돈과 명예를 숭상하도록 훈련받은 것이 우리 인간들입니다.

좀 전에 핸드백을 갖고 싶어 했던 그 자매님 이야기로 돌아가 봅시다. 사람들은 스스로가 생각하는 좋은 그리스도인의 기준을 정하고 그것을 지키려고 애를 씁니다. 문제는 그것이 자신의 내면의 욕구와 갈등을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것을 억제를 하지요. 그것을 신앙심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과연 그것이 좋은 신앙심, 올바른 신앙심일까요? 우리는 진리 안에서의 의로움, 거룩함을 자신의 의지나 감정에 역행하는 어떤 것들로 규정을 하고 그것을 가꾸는데 주력해왔습니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외면을 내가 생각하는 ‘그리스도인 다움’으로 치장하려 했을까요? 그것을 기독교 상담심리학자인 래리크랩은 ‘나쁜 의도’라는 말로 불렀습니다. 겉으로는 좋은 것이고 결과는 인간들이 만족할만한 것이 나오지만 결국 그 내부에 숨겨진 의도는 매우 자기 중심적이며 하나님의 뜻과는 무관한 인간의 인간존엄성 챙기기에 불과 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나쁜 의도들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뒤에 집중적으로 살펴 보겠습니다.

거짓자아가 무엇일까요? 만약 당신이 내면으로부터 이렇게 속삭이는 소리를 듣는다면 당신은 거짓자아에 속고 있는 것일 수 있습니다.

“너는 할 수 있어 그런데 왜 포기하려고 해?”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거야!”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은 자이므로 당신은 죄로 인해 망가진 그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야해 그러니까 열심히 노력을 하야지!”

“그런 일을 하면 하나님이 좋아하실까?” 등등

수많은 내면의 속삭임들은 우리가 듣기에는 성령님이 우리에게 속삭이는 것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그 속삭임에 당신이 얽매이기 시작하고 그것을 행하기 시작한다면 아마도 당신은 ‘거짓자아’에 속고 있을 수 있습니다. 크리스찬들이 가장 쉽게 속는 거짓자아 중 하나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주일마다 강단에서 선포되는 그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기 위해 허덕이는지 말입니다. 기독교인들이 자기 마음대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정해서 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지만, 언제 하나님께서 그런 목적을 우리에게 두셨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 출처불명의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 많은 사람들을 종교 중독자로 만들고 거짓자아로 똘똘 뭉친 괴물을 만들어 내는 주범임을 알아야 합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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