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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ch 5, 2015 | by B2B Missions
제자훈련시리즈[3] 제2강 건강하지 못한 영성 (거짓자아) — 두번째

2 건강하지 못한 영성 (두번째)

성경을 읽다보면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을 중심으로 한 유대인들의 삶의 태도나 종교적 신념들을 많이 접하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그러했듯이 우리들도 그들의 삶을 비판하곤 하지요. 율법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면 ‘바리새인’같다고들 말을 합니다. 물론 유대주의자에는 바리새인들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두개인들도 있고 에센파도 있었습니다. 성경에는 특별히 나오지 않지만 열심당원들도 있었습니다. 유월절에 예수님이 잡혀오시는 바람에 사형직전에 죽음을 모면한 바라바도 열심당원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주위에는 예수님을 대적하는 세력들이 있었으며 결국은 그들의 손에 의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게 됩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소위 ‘훌륭한 그리스도인들’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우리들은 과연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을 대적했던 이들보다 나은 점이 있을까요? 정말 우리가 그들을 비판할 자격이 있나요? 잘못된 종교적 열정은 신앙을 왜곡하고 나아가 하나님 앞에서 건전한 자아상을 만드는데 걸림돌이 됩니다. 오늘의 주제를 빌어 말한다면 ‘거짓자아’의 주범입니다. 성경 한곳 찾아 읽겠습니다. 마태복음 23장 15절에서 33절입니다.

[1]“13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14 (없 음)

[2] 15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3]16 화 있을찐저 소경된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17 우맹이요 소경들이여 어느 것이 크뇨 그 금이냐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18 너희가 또 이르되 누구든지 제단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그 위에 있는 예물로 맹세하면 지킬찌라 하는도다 19 소경들이여 어느 것이 크뇨 그 예물이냐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 20 그러므로 제단으로 맹세하는 자는 제단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으로 맹세함이요 21 또 성전으로 맹세하는 자는 성전과 그 안에 계신 이로 맹세함이요 22 또 하늘로 맹세하는 자는 하나님의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로 맹세함이니라

[4] 23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찌니라 24 소경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약대는 삼키는도다

[5] 25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26 소경된 바리새인아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6] 27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28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7] 29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가로되 30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면 우리는 저희가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데 참예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 31 그러면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 됨을 스스로 증거함이로다 32 너희가 너희 조상의 양을 채우라 33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마 23:13-33).

예수님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일곱번에 걸쳐 “화 있을찐저”라고 외치십니다. 이 ‘화 있을찐저’는 헬라어로는 ‘호우나이’ (Οὐαὶ) 인데 이 단어는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비통을 동시에 표현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육체적, 정신적으로 고통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그것도 일곱 번씩이나 말이지요. 그렇다면 이들이 고통스럽고 비통을 당해야 할 일을 한 것이 도대체 무엇들이죠? 오늘의 주제 ‘거짓자아’와 연결하여 이들이 갖춘 것들, 밖으로 보이는 것들과 실제 그들의 모습을 알아 보기로 하겠습니다. 참고로 위 말씀은 유대주의의 겉치례, 위선과 종교의식을 비판하신 말씀입니다. 그것이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가 이닐 수 없습니다. 그것도 열심히 신앙생활을 한다는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라는 점에서 그 심각성이 있습니다.

첫째, 거짓자아는 안식을 주지 못합니다.

13절을 보면, 예수님은 천국문을 닫고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에 쓰인 시제는 현재형입니다. 지금 그러고 있다는 말이지요. 그러니까 이들 앞에만 가면 천국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이 막히는 겁니다. 우리는 죽어서나 천국에 가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이 말과 거짓자아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의문을 가지는 분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천국은 그리스도 안에서 지금 우리가 누려야 하는 현재적인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 누릴 수 있는 그 하나님의 나라의 삶을 누리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지요. 그 방법은 아주 간단합니다. 자신을 잘 꾸미도록 강요하면 되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글에서 읽었는데 한국의 한 신학교 교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당신은 사람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입니다. 지금도 그 사랑 받고 있습니다.”라는 말이 가장 황당한 거짓말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듣기에 따라서는 너무 좋은 말입니다. 또 맞는 말이기도 하지요. 하나님과 인간간의 관계에서는 더더욱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만큼 사람을 힘들게 하는 말도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나는 사랑받을 권리가 있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나 좀 사랑해 달라!” 그런가요? 아닙니다. 성경은 정 반대로 말씀하고 있잖아요. 어떻게 되어 있죠? “사랑하라!”입니다. 가족이 나를 사랑하지 않든 안하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든 안하든 친구가 나를 사랑하든 안하든 그것은 내가 상관할 일이 아니고 나는 무조건 사랑해야할 의무가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남들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을 하면 너무 힘이들잖아요. 왜 힘이 들까요? 자신의 거짓자아는 외부로부터 좋은 것을 공급받아만 성장하는 성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외부의 칭한, 외부의 보살핌, 배려, 사랑등에 굶주려 있는거예요. 그런 성향 때문에 쉼이 없는 것입니다. 쉼이 없는 삶이 바로 이 세상의 삶이요. 그리스도 안에서 누릴 수 있는 안식을 못누리는 삶입니다.

신앙에 대한 이러한 태도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위해 늘 무언가를 행하도록 합니다. 그러나 단호하게 말씀드리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전혀 없습니다. 어떻게 인간들이 하나님을 위해 무언가를 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솔로몬은 하나님을 위한다고 성전을 지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하나님이 거하셨나요? 지금 내가 하는 사역을 잘 생각해 보세요. 많은 사람들이 사역을 하나님을 위해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정말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사람이 있으나 없으나, 하고 있는 일이 마음에 드나 안드나, 동역자들이 열심히 함께하나 안하나 상관없이 오로지 하나님을 위해 군소리 없이 사역을 하나요? 그렇지 않지요. 사역을 하면서도 인간들로부터 무언가 칭찬도 바라고 동기부여도 바라는 것 아닌가요? 그게 인간이잖아요.

예를들어 보지요. 많은 선교사님들이 선교자리 가실 때에는 성령충만(?)해서 떠납니다. 처음에는 언어도 배우고 현지 적응도 하고 열심히 사역에 매진을 합니다. 한해 두해 지나면서 점점 외로움과 고통이 찾아 옵니다. 그러면, 자신을 돌아 보지요. 그동안 밀렸던 기도도 한꺼 번에 해보고, 성경도 읽고 심기 일전해서 또 사역을 시작합니다. 하지만 “왜 나만 이런 낯선 곳에서 낯선사람을 대상으로 열매없는 사역에 매달려야 하나?” 하는 생각을 하면 때론 화가 나기도 합니다. 결국은 영적으로 감정적으로 육체적으로 탈진을 하게 되지요. 왜 그럴까요? 모든 것으로부터 단절된 것처럼 느끼고 심지어 하나님조차 자신을 바라보지 않는다는 생각 때문이지요. 그곳에서는 ‘거짓자아’라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거든요.선교지에는 아무런 소용이 없는 그 거짓자아가 그곳까지 함께 와서 가끔 괴롭히는 것이거든요. 문득문득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싶어지는 욕망말이지요.

둘째, 거짓자아는 전염성이 매우 강합니다.

15절을 읽으십시오.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것은 동료의식입니다. 우리가 다른사람들과 어울리기 위해서는 그 사람들과 장소, 시간, 컨텐츠, 심지어 사용하는 언어도 같아야 합니다. 바리새인들은 바리새인이 되지 않으면 친구가 될 수 없었습니다. 세리가 바리새인이 되기 위해서는 세리라는 직업을 버려야 했고, 철저하게 바리새인 교육을 받아 자신의 신분을 세탁하고, 그들의 동의를 얻어야 합류할 수 있었습니다. 그냥 사상에 동조하는 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삶 그자체가 비리새인이 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요. 외견상 그들의 삶이 그렇게 나빠 보이지 않습니다. 사실 그렇게 살아야 된다는 생각을 가진 분들도 많습니다. 말로는 아니라지만 실제로 가르침을 보면 알 수 있지요. 예수님이 오서셔 그들의 위선을 폭로하기 전에는 그들의 삶 자체는 의롭고 거룩한 삶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을 ‘거짓자아’로 똘똘 뭉쳐진 사람들이라고 비판을 가하신 것이지요. 자신에게 솔직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이 이중생활입니다. 교회에서의 생활, 가정에서의 생활, 사회에서의 생활이 다 다릅니다. 전혀 다른 사람들 같아요. 최소한 가면이 세개 쯤 있는 것이지요. 여러분들 교회분들 만나서는 그리스도인 모드로 들어가지만 사회에서는 한푼이라도 더 벌고 아끼려고 악착같이 행동하잖아요. 미국은 그런일이 드문데 한국에서는 교통문화가 많은 부분개선이 되었다지만 그래도 아직 운전을할 때 많은 사람들이 차 안에서 화들을 많이 냅니다. 누가 불법적으로 끼어들기라도 하면 욕을 해대고 심지어 끝까지 쫒아가서 보복을 하기도 하지요.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미국에 오면 잘 그렇게 안하는 것 같습니다. 당연히 양보를 하고 무슨 바쁜 일이 있는가 보다 그렇게 생각을 하지요. 그것을 문화라고 합니다. 문화에 불편을 느끼는 것은 그 문화가 안맞는다는 말입니다. 여러분들 교회에 처음 나오셨을 때 어떤 느낌이셨나요? 교회를 옮길 때도 같습니다. 너무 어색한 거예요. 아무도 자신을 반겨 주는 사람이 없는 것 같고, 외톨이가 된 기분이 되지요. 그러다가 점점 교회 생활에 익숙해지면 사역도 하고 여러가지 활동에도 참여합니다. 그 중에서 가장 많이 변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언어습관, 생활습관입니다. 교회에 오면 그 교회용으로 바뀌는 것이지요. 물론 자신의 내면에는 또 다른 내가 웅크리고 앉아 있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종종 가정에서도 종종 교회용 인간이 될 것을 강요당합니다.

예를들어, 목사님들 처럼 교회에서 사역을 하시는 분들이 종종 집에서 당하는 것이 있습니다. 집에서 사소한 일로 짜증을 내거나 분노를 표출하면 아내가 말하죠. “당신은 목사라는 사람이 교회에서는 안그러면서 왜 집에서는 그래요? 성도들이 이 사실을 알면 얼마나 실망할까?” 마구마구 퍼부어 대면 조금 대꾸를 하다가 슬그머니 자리를 피합니다. 그리고는 하나님께 기도하죠. “하나님 제가 오늘도 부부싸움으로 번지지 않고 잘 막았죠? 그래도 제가 영적으로 성장하긴 한 모양이예요.” 이 경우 누가 문제인가요? 잘못을 지적하고 교회의 삶의 태도와 가정에서의 삶의 태도가 다름을 지적하는 아내인가요? 아니면 부부싸움으로 번지지 않게 지혜롭게 처리한 남편인가요? 둘 다 문제입니다. 대부분의 여자분들은 남편들이 밖에서든 안에서는 존중받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남편의 잘못된 모습을 보면 화가 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지적을 합니다. 많은 아내들이 이런 생각을 하지요. ‘집에서 바가지라도 긁어대니까 그나마 남편이 그 정도로 변화된 사람을 산다’고 말이지요. 아내들이 바가지를 긁어대니까 그나마 저 정도의 인간이 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남편들은 어떻게 생각하냐? “그래 나의 아내는 너무 고마운 사람이야. 이사람이 없었으면 내가 참 사람이 엉망이었을꺼야. 그런데 이 사람 덕분에 이 정도 인간이 되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이렇게 생각하나요? 안 그래요. “으이구 또 잔소리네. 소나기는 피하고 보는 것이라고 했으니 지금도 참고 피하지 그것이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지. 좀 더 성숙한 내가 참자.” 이럽니다. 그러니 평생가면 그것이 고쳐지겠어요. 요령만 늘고 가식만 늘어나는 것이지요. 그 늘어난 요령과 가식들이 바로 ‘거짓자아’ 인 것입니다. 그게 굳어져 아예 패턴이 되었어요. 패턴이란 늘 그 답이 나오는 것이지요. 패턴이 성격을 만듭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의 지금 신앙심이라고 하는 것들의 대부분은 길들여진 패턴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지요. 그것을 벗어버려야 진짜 자기가 보입니다. 진짜 신앙은 그것을 벗는 것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셋째, 거짓자아는 자기자신에게 약속을 하고 지킬 것을 강요합니다

16~22절을 보면 맹세라는 단어가 많이 나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맹세의 의도를 설명하고 있지만 저는 맹세 그 자체를 이야기 하고 싶습니다. 여러분 약속이라는 것은 지키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켜지지 않은 약속을 하면 안하느니 못한 것들이죠. 통상적으로 약속에는 약속의 대상자 즉, 상대방이 있습니다. 시간을 잡기도 하고 회의를 잡기고 하고 오늘같이 강의 약속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제일 많이 하는 약속이 무엇인지 아세요? 나와 내가 하는 약속입니다. 새해만 되면 다짐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하늘을 두고 맹세를 하는 분들도 있지요. 담배를 끊자! 술을 끊자!책을 한 달에 한권씩은 읽자! 성경통독하자! 교회에서 사역을 열심히 하자! 등등 수 많은 약속을 스스로에게 합니다. 그러면 약속을 하는 나와 그것을 지키는 나는 같은 인격체 인가요? 아니면 서로 다른 인격체 일까요? 하나는 거짓된 자기 모습이고 다른 하나는 참 자기 모습니다. 그러면 누가 누구에게 주문을 하는거죠? 거짓자아가 참 자아에게 그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 자아는 그것을 할 능력도 의지도 없어요. 그러니까 계속 다짐만 하는거죠.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거짓자아가 그것들을 하려고 노력을 하지요. 결국 어느정도 성취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죠? 자존감이라는 것이 확 올라가잖아요. 문제는 결국 그 사람을 망치게 되고 이웃을 망치게 됩니다. ‘내가 이렇게 되었으니 너도 이렇게 되어라! 그렇게 사는 것이 합당하다!’라고 강요하는 것입니다. 물론 사도바울도 나를 닮는 자가 되라고 말씀했습니다. 그의 말은 그가 어떻게 거짓된 자아를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와 그 안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그 풍요를 누리는 삶을 닮으라는 말입니다.

건전한 자아상을 가진 분들은 모이면 두 가지 특징을 갖는 답니다. 첫번째는 상대방이 어떤 행동을 해도 자신의 눈에 거슬리지 않은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그렇게 때문에 자신의 생각이나 인생관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사실 자신에게 아무런 문제가 없으니 남들에게 강요할 것도 없는 것이지요. 이런 경우는 아주 특별한, 그러니까 하나님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만이 경험할 수 있는 아주 특별한 경험을 합니다. 이 경험은 우리의 정체성에 관한 경험인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된 완전한 합일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되었으니 서로가 갈등을 일으킬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둘째, 우리는 서로 서로가 하나도 겹치지 않는 완전한 인격체라는 것입니다. 비록 부부라고 할지라도 부모 자식이라고 할지라도 서로 완전한 독립적인 인격체라는 말이지요. 서로가 건드리는 영역이 없기 때문에 서로를 간섭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 두가지 양립할 수 없는 인격적인 결합과 독립이 우리 그리스도인 들의 정체성입니다. 그러면, 타인을 향해 암묵적이든 실질적이든 어떤 요구를 하거나 그것이 성취되지 않는다고 힘들어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지요. 물론 지금은 이론으로 들릴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는 이런 상태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들이 많습니다. 차근차근 진행해 보기로 하지요.

그런데 이런 완전한 합일과 완전한 독립은 거짓자아와 참자아의 관계 즉, ‘두개의 나’ 사이에서도 가능합니다. ‘두개의 나’라는 존재가 완전히 합일 되었을 때에는 둘 중에 하나가 죽었을 때입니다. 그 때 경험되어지는 것이  평강이요 기쁨이요 안식입니다. 그런데 그 평강과 기쁨이 가짜일 수가 있습니다. 언제 가짜일까요? 거짓자아가 살고 참자아가 매몰되었을 때입니다. 그 때는 거짓자아가 주는 거짓 기쁨, 거짓안식, 거짓평화가 잠시 지배를 하지요. 그런데 이내 참자아가 살아납니다. 참자아는 절대 죽지를 않아요. 그러면 두 자아간의 갈등이 심화되고 거짓자아는 참자아를 죽이려고 하지요. 그것이 내적인 싸움입니다. 그런데요. 슬픈 사실은 거짓자아의 승률이 월등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진정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그 누림이 없습니다.

다음으로 거짓자아와 참자아가 완전히 독립되었을 경우를 말합니다. 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서로 간섭하지 않는다는 것인데 이 때는 언제일까요? 거짓자아를 완전히 죽였거나 정신병에 걸렸거나 둘 중의 하나입니다. 자신의 실존을 거부하다 보니 생긴 문제입니다. 거짓자아를 무너뜨리는 것 보다는 이중인격으로 살아가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둘이 약속을 할 필요도 다짐을 할 필요도 없지요. 이런 분들도 의외로 많습니다. 자신조차도 인격이 이렇게 분리된 줄을 잘 몰라요. 그런데 이런 분들은 타인이 보기에는 매우 불편합니다. 이런 분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하나님의 처방은 유일합니다. 철통같은 아성인 거짓자아를 강제로 하물어 버리는 것입니다. 바벨탑같은 것이지요. 바벨탑이 무너져야 그것을 통해 하늘에 오르려는 생각자체를 안하게 되잖아요. 그러면 자신이 누구인지 원래의 자기를 찾아 갑니다.

넷째, 거짓자아는 자신의 잘못을 다른 것으로 보완하려고 끊임없이 시도합니다

23~24절을 보겠습니다. 여기에서도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이중성을 지적하십니다. 그런데 그들이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는데 정작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고,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삼킨다고 말씀합니다. 물론 하루 살이와 낙타를 결정하는 기준은 바리새인들에게 있고, 그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것이 하루살이인지 낙타인지를 늘 살피게 되는 것이지요. 모든 행위의 판단 기준은 물론 자신이고 전통입니다. 성경말씀은 자신들의 해석기준에 맞추어져 왜곡되어 이해되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만약 그런 것을 행하지 못하면 어떻게 되느냐? 그들이 자신들이 잘한다고 생각한 것을 이행하지 못했을 때에는 어떻게 될까요? 당연히 해야 한다는 것을 못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죄책감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그 죄책감은 또 따른 행위를 만들어 내지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혹사시켜서라도, 헌금을 많이 해서라도, 자신이 잘못한 부분을 커버하려고 합니다. 자신의 더러운 냄세를 제거하기 위해 옷을 갈아입거나 목욕을 하는 것이 아니고 진한 향수를 뿌리는 겁니다. 그 향수는 다른 사람들은 물론 본인의 코까지 마비시켜 원래 자신에게 나던 냄새를 가립니다.

문제를 회피하기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는 예가 대표적입니다. 자신에게 요구되는 영적인 변화를 회피하기 위해 열심히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래서 적자 인생이라고 생각하는 그것을 흑자로 만들려고 하는 것이지요. 왜 바리새인들이 십일조를 드렸을까요? 예수님 보시기에 그들의 부족함을 좀 가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진정한 신앙은 그런 식으로 커버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온전히 거짓자아를 발견하고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허수아비임을 깨닫는 것이 올바른 신앙의 지름길이지요.

다섯째, 거짓자아는 겉과 속이 다른 삶을 살도록 합니다.

25절~28절에는 화 있을찐저 라는 단어가 두번 나옵니다. 이는 당시 유대주의의 핵심 가치인 ‘정결’과 ‘의를’ 나누어 설명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25~26절은 정결에 관한 문제를 다룬 것이고, 27~28절은 의에 대한 문제를 다룬 것이지요. 이 둘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겉과 속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 욕하지 마세요. 그것이 저와 여러분들의 모습이잖아요. 속으로는 화가 나면서도 아닌 척, 싫은데도 싫다고 못하고, 늘 사람들에게 나이스한 사람, 훌륭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하잖아요. 그게 본인의 정체성이라고 생각을 하는 것이지요. 이제까지 다룬 것 처럼 그것이 ‘거짓자아’입니다. 자신이 아닌 어떤 것이 자신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고, 여러분들도 그것을 ‘참 자아’라고 속고 있는 것이지요.

교회에서 열심이 봉사를 하는 한 분을 예로들어 보겠습니다. 그 분은 묵묵히 열심히 일을 합니다. 누가 보나 안보나 열심이지요. 그런데 어느날 자신이 일하는 그곳을 담임 목사님이 지나가셨어요. 그 목사님은 일하는 모습을 보시고는 이내 아무 말없이 휙하고 스치며 다른 곳으로 가셨습니다. 그러면 마음이 어떻습니까? 화가 나지요. “목사가 되가지고 내가 이렇게 일을 하고 있으면 와서 격려의 말 한마디라도 해야 하는 것 아냐? 너무하는 것 아냐?” 이렇게 말입니다. 그러면 모든 평강이 깨집니다. 모든 것을 내려 놓고 쉬고 싶을 겁니다. 아무도 알아 주지 않은 이 일을 내가 왜하나 싶은 거예요. 이럴 경우 ‘참 자신’은 무엇이죠? 쉬고 싶은 나입니다. 그 모습이 진짜예요. 그럼 쉬시는 것이 좋습니다. 불평하지 말고 말이죠. 그런데 궁시렁 대면서도 계속합니다. 앞에서는 아무말도 못해요. 내가 이런 것은 싫다. 나는 이런 것을 좋아한다. 그게 나다. 이렇게 말을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신이 규정해 놓은 훌륭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에 포함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을 이중성이라고 하고 위선이라고 합니다.

여섯째, 거짓자아는 자신들은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고 있는 것이라 주장합니다.

마지막으로 29~33절을 보겠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만약 그 예날에 살았다면 선지자들을 죽이는 그런 사람들은 되지 않았을 것이라 말합니다. 그 말은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정확히 알고 진리 안에 있으며, 진리를 실천하고 있다고 생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정말 그랬을까요? 이처럼 거짓자아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옳다고 생각을 하고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내가 옳으니 내말을 들으라는 것이지요. 내가 생각하는 것, 내가 행동하는 것 모든 것이 정통이고 진리라고 말합니다. 그렇데 살상은 어떠했습니까? 결국 그들은 진리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는데 앞장섭니다. 그것도 이 말씀을 들은지 바로 얼마 뒤에 말이지요. 여러분들 스스로의 내면을 잘 살펴보세요. 그렇게 열심히 성경공부하는 동기가 뭐죠? 왜 내가 성경공부를 하고 진리를 알려고 노력하죠? 하나님을 위해서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요?

여기서 피터 스카지로 목사님이 그의 책 정서적으로 건강하지 못한 징후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잘 들어 보세요.

  • 하나님이 아닌 내 만족을 위해 그분의 사역을 한다.
  • 하나님이 요구하지 않은 그 일을 그분의 이름으로 한다.
  •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기 보다는 내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기도한다.
  • 사람들에게 좋은 평판을 얻기 위해 기독교인의 미덕을 실천한다.
  • 하나님의 진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두려움과 해결되지 않은 내 문제를 위해 성경의 진리를 임의대로 적용한다.
  • 하나님의 진리를 이용해 다른 사람들을 깎아 내리고 판단한다.
  • 다른 사람들과 경쟁할 목적으로 내가 한 사역을 과정한다.
  • ‘주님이 이 일을 원하시는 것 같아’라는 생각이 들 때에도 ‘주님이 이일을 명령하셨어’라고 말한다.
  • 가족, 사회, 국가의 잘못을 하나님의 주권에 입각해 객관적으로 평가하지 않고 오히려 성경구절을 인용해 적당히 정당화하려 한다.
  • 하나님에 관한 말을 하는 척 하면서 내면의 약점을 은폐하고, 실패의 이유를 적절히 둘러댄다.
  • 삶의 변화를 요구하는 상황을 회피하고, 내 목적에 맞게 성경의 진리를 선택적으로 인용한다.

여러분들은 몇가지나 해당되나요? 저는 대부분이 해당됩니다. 많은 경우 얼렁뚱땅 넘어갑니다. 자기합리화를 하지요. 그것이 거짓자아의 특징입니다. 참자아는 자신이 온전히 벌거벗은 모습이라는 것, 하나님 앞에서 철저하게 무능한 자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사용하신다는 점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에게는 영광이 없고 하나님께만 있게 되는 것이지요.

결론을 맺겠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인식하지 못하고 신앙생활을 해도 늘 남을 의식하는 그런 삶을 사는 것, 자신의 삶에도 솔직하지 못하는 것, 남들을 판단하고 남들도 나와 같은 사람을 살도록 요구하는 것, 타인과 자신간의 경계를 잘 모르고 서로 얽힌 삶을 살아가는 모든 것들은 우리들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안에 있는 또 다른 나의 지배를 받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나를 올바로 발견하고 그것이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서 처리되었느냐?를 아는 것이 건전한 신앙생활의 시적점이 됩니다. 비로소 신앙인이 되어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지요. 그 전에는 신앙생활이 아닌 내가 나를 섬기는 생활입니다. 정말 명심하셔야 합니다. 자기 자신이 신이 되어 자신을 섬기는 ‘자아숭배’라는 우상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우리는 하나님 앞으로 한 발짝도 다가설 수 없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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