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심걱정
March 25, 2015 | by B2B Missions
제자훈련시리즈[3] 제 5 강 어떤 것들이 거짓자아를 만들어 내는가?[2] (거짓자아의 이면)–첫번째

잘못된 충동 3: 나는 안전한가? (Am I Safe?)

A목사님의 이야기

A목사님은 늘 분을 참지 못하는 것 때문에 힘들어 하고 있습니다. 목사로써 교회에서는 늘 인자하고 온화한 모습을 보이면서도 집에만 돌아 오면 작은 일에도 분을 내는 자신을 보면서 심각한 고민에 빠졌습니다. 특히 사춘기에 들어간 아이들이 자신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삶을 사는 것을 보면 갑자기 분노가 치밀고 아이들에게 큰 소리를 내게 됩니다. A목사는 제일 먼저 스스로에게 자책을 합니다.

“네가 목사냐?”

스스로에 대해 실망도 하고 자책도 하지만 쉽게 고쳐지지 않는 것이 성격입니다. A목사님은 자기가 왜 이런 성격을 가지게 되었는지에 대해 고민을 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성격을 고칠 수 있는 온갖  방법들을 연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아이들에게 화를 내지 말고 그 분노의 원인이 되는 문제들을 제거하는 것이 더 나은 길이라 생각을 한 것이지요.

우선 목사로써 교회 일에는 열심이었으나 정작 집안을 돌아 보는 일에는 소홀 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집을 ‘예배드리는 공동체’로 바꾸면 분명히 하나님께서 도와 주셔서 아이들이 ‘원하는 모습’으로 변할 것이 확실하다고 믿었습니다. 가정예배 시간이 아이들에게 A목사의 생각을 전하는 아주 효과적인 도구가 될 것이라고 생각을 한 것이지요. 아이들이 부모를 배반하고 어긋나기 시작하면 성경에서 부모 공경에 대한 교훈을 가지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면 아이들은 말없이 이야기를 들었지요. 하지만 그때 뿐 효과가 없었습니다. 아이가 공부보다 컴퓨터 게임에 몰두하면 아이들로부터 컴퓨터를 제거 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컴퓨터를 빼앗았습니다. 심지어 아이가 심취할만한 도구들은 다 감추어 버렸습니다. 아주 필요한 경우 이외에는 게임을 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컴퓨터 시간만 줄이면 그 시간에 공부를 할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었습니다. 그러자 아이는 밖으로 나돌기 시작하였습니다. 친구들을 만나고 늦게 들어 오는 것이지요.

“너 요즘 공부는 안하고 누구 만나고 쏘 다니다가 이제 들어 오는 거야?”

하루는 늦게 들어 오는 아들에게 기다리고 있던 A목사님은 화가 치밀어 이렇게 말을 하고야 말았습니다.

“내가 누구를 만나든 무엇을 하든 아빠가 무슨 상관이예요?”

아이도 목소리를 높여 아버지께 대듭니다.

“너 내일부터 외출금지야. 나갈 때에는 누구를 만나는지, 왜 만나는지, 그리고 언제 들어 올 것인지를 나나 엄마에게 이야기 하고 나가! 알았지?”

A목사는 적어도 아이가 밖에서 무엇을 하고 다니는지, 누구를 만나는지, 소위 나쁜 아이들을 만나 물들지는 않는지 등에 대해 알아야 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물론 A목사는 사랑이 무엇인지, 아이들을 올바로 양육하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 믿음으로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막상 집에서는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더 확실한 방법(?)을 적용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아이가 자신이 원하는 범위의 모범생이 될 때까지 그 일을 놓을 수가 없습니다.

이 일이 잘될까요? 자식들이 사춘기에 반항할 때 부모가 아이를 이러한 대증요법을 통해 그 아이를 올바로 이끈 예는 거의 없습니다. 일시적으로 효과는 있을 수 있어도 결국 아이는 나이가 들면서 자연스럽게 해결되니까요. 이렇게 억지로 아이를 자신의 품안에 가두어 놓는데 성공한 부모들은 그 순간에 자식이 자랑거리가 될런지 몰라도 이후의 삶 속에서 자신과의 관계를 보면 늘 그런 것 만은 아닙니다. 아이는 성장하여 부모로 부터 더 멀리 떠나 버리고 맙니다.

그런데 왜 A목사는 아이들에 대해 이렇게 집착에 가까운 관심을 보이는 걸까요? 그것은 바로 아이의 미래에 대한 불확실을 줄이고자 하는 욕망 때문입니다. 청소년기를 잘보내야 아이들이 건전한 신앙도 갖게 되고, 열심히 공부를 해야 이 세상을 살아는데 유리한 위치를 점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지요. 그런데 자신의 아들을 보면 이미 글러 먹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어 그것이 마음을 불안하게 하고 결국은 이런 방법 저런 방법을 써서 아이를 통제하려고 하는 것이지요.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불안함을 제거하기 위해서 자신이 생각하는 방법이라는 방법은 총동원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래리크랩 박사는 ‘벽에 회를 칠하는 사람’이라고 명명했습니다. 이 사람의 질문은 늘 ‘나는 안전한가?’입니다. 그래서 벽에 조그만 금이라도 보이면 회를 칠해 그것을 제거하려 합니다. 하지만 벽 그자체를 그대로 둔채 겉만 칠한다고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지요. 결국은 그 벽 자체가 무너지고 나서야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게 됩니다. 성경의 인물중 이렇게 벽에 회를 칠한 사람, 자신의 안전만을 위해 모든 것을 걸었던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바로 사울왕입니다.

사울왕 이야기

우리 모두가 아는 바와 같이 사울왕은 이스라엘의 왕국의 초대왕입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건장했고, 용모도 뛰어났습니다. 물론 전쟁에도 능해 수 많은 전쟁에서 승리를 했으며, 이스라엘을 그런대로 효과적으로 지켜냈습니다. 하지만 아주 볼품없는 미소년 같은 다윗의 등장은 영원할 것 만 같았던 그의 미래를 혼돈과 불확실이라는 어두운 공간으로 밀어 넣어 버립니다. 물론 그의 마음으로 인해 생긴 문제이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그의 인생을 살펴보면 그는 한번도 밝은 곳에 살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는 늘 자신이 불안전하다고 생각하고 살았습니다. 누군가가 자신을 죽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달린 것이지요. 그는 갑옷으로 무장을 하고, 수 많은 군사들에게 둘러쌓여 있었어도 그것들이 그의 불안함을 없애지는 못했습니다.

사울왕이 왕이 될 때의 모습은 겸손 그 자체였습니다. 그는 충분히 자신을 자랑할 만한 조건을 갖춘 사람이었는데도 그러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그의 용모에 대해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기스가 아들이 있으니 그 이름은 사울이요 준수한 소년이라 이스라엘 자손 중에 그보다 더 준수한 자가 없고 키는 모든 백성보다 어깨 위는 더하더라” (삼상 9:2).

게다가 그의 아버지 기스는 유력한 사람이었습니다. 영어성경에는 유력한 자를 힘이 있는자, 재산이 많은 사람, 뛰어난 사람 등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사울은 효심도 깊었던 모양입니다. 그는 잃은 양을 찾다가 집에 계신 아버지가 자신을 걱정할 것을 생각할 정도로 아버지를 배려하는 마음도 있었습니다. 게다가 그는 겸손하기까지 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지도자 사무엘이 그를 만나 그에게 “온 이스라엘의 사모하는 자가 누구냐 너와 네 아비의 온 집이 아니냐?” (삼상 9:20)라고 말하며 그가 하나님이 택한 왕이라고 이야기 했을 때 그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는 이스라엘 지파의 가장 작은 지파 베냐민 사람이 아니오며 나의 가족은 베냐민 지파 모든 가족 중에 가장 미약하지 아니하니이까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이같이 말씀하시나이까?” (삼상 9:21)라고 대답하며 자신을 한껏 낮추었습니다.

이런 사울이 왕이 된 이후에는 늘 자신의 자리를 염려하는사람이 되고 맙니다. 왕의 자리에 오른 후에 그의 관심은 온통 “불안한 나의 왕위를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에 있었습니다.  그는 늘 자신이 안전하지 못하다 생각했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거나 누군가 자신보다 앞서간다고 생각을 하면 그를 적으로 생각하고 그 불안요소를 제거하는 일을 나랏 일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그와 관련한 몇 가지 에피소드를 살펴 봄으로써 그가 얼마나 많은 시간들을 불안하게 세워져 있는 ‘왕위’라는 벽에 그만이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회’를 덧칠 해왔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왕위를 올바로 세우는 것이 백성을 올바로 위하고, 국방을 튼튼히하여 살기 좋은 나라로 만드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권위를 내세우고, 왕위에 불안한 요소들을 제거하는 일에만 열중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보다는 백성들의 환심을 사려는데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아마도 그것이 자신의 불안한 왕권을 지키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을 한 것이지요. 사무엘 상 15장에는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가 나옵니다. 사울왕이 아말렉과 전쟁을 하기 전에 선지자 사무엘은 사울왕에게 이렇게 하나님의 명령을 전합니다.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 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먹는 아이와 우양과 약대와 나귀를 죽이라”  (삼상 15:3).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아멜렉과 전쟁에서 대승을 한 후 사울과 백성들은 아말렉 왕 아각을 죽이는 대신 사로 잡았으며, 아말렉이 소유했던 짐승들 중 가치없고, 작은 것들만 진멸하고 나머지 좋은 것, 기름진 것들은 그대로 끌고 왔습니다. 이후 사무엘이 이를 지적하자 여호와께 제사를 지내려고 그랬다고 핑게를 대지만 그들이 소유하려고 한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그가 백성들과 같이 그런 일을 저질렀다고 한 것을 보면 이 일을 통해 그는 백성들에게 환심을 사고자 했습니다. 그들에게 잘 보여서 자신의 왕권을 공고히 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를 호되게 질책하는 사무엘에게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과 당신의 말씀을 어긴 것은 내가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 말을 청종하였음이니이다” (삼상15:24).

아직도 그에게 그의 왕권은 공고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것을 그는 자신의 힘으로 지키려 한 것입니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다윗에 골리앗을 물리친 후 사울은 그를 매우 극진히 대우했습니다. 그를 군대 장관으로 삼았고, 그를 자신의 곁에 두었습니다. 그는 다윗이 그의 든든한 후원자 역할을 할 것이고, 자신의 왕위를 공고히 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에 대한 그의 마음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블레셋과 싸움에서 이스라엘을 괴롭히던 가장 큰 골치거리인 골리앗을 죽이고 개선하는 사울 일행을 향해 연도에서 그들을 맞이한 여인들은 이미 골리앗의 죽음에 대한 소식을 들었는지 그들을 향해 이렇게 외칩니다.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삼상 18:7).

이 말을 들은 사울은 즉각적으로 불쾌함을 드러냈습니다. 그는 속으로 다윗이 백성들에게 이렇게 인기가 많은 것을 보면 그가 인기를 힘입어 왕의 자리를 넘볼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날 이후로 사울은 다윗을 주목해서 봅니다. 물론, 다윗을 심하게 경계한 것이지요. 약속대로 다윗을 사위로 삼았지만 그의 곁에 있는 다윗은 눈엣가시가 되어 버렸습니다. 다윗만 보면 그가 왕의 자리에서 쫒겨나는 것을 생각합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스스로 비참한 미래를 생각하며 마음으로부터 이미 비참하게 권자에서 물러난 것을 상상합니다. 그래서 그는 다윗을 죽여야만 이러한 고통으로부터 해방될 것이라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번에도 나라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고, 백성들을 적으로부터 지켜내며, 그들에게 희망을 주는 정책을 펴서 자신의 왕권을 유지하려 하지 않고 현재 있는 위협(실제로는 전혀 위협이 아니였습니다.)을 제거함으로써 왕권을 지키려 노력합니다. 그 이후 그가 어떻게 다윗을 죽이려 노력했는지는 이미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또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그는 블레셋사람이 군사를 모아 이스라엘을 친다는 소식을 듣고 하나님께 기도를 했으니 하나님은 이미 그를 떠난 상태였습니다. 이스라엘을 위해 기도를 하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전했던 사무엘도 이미 죽은 상태였습니다. 더 이상 어떤 형태로도 그는 하나님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결국 불안한 마음에 무당을 찾게 됩니다. 자신의 앞날이 너무 불투명하자 하지 말아야 할 일까지 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불행한 왕 중의 하나였던 사울이 왜 그토록 자신의 자리에 집착을 하게 된 것일까요? 그의 삶의 거슬러 올라가 보면 너무도 비참한 역사가 그의 기억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기브아 출신입니다. 기브아는 사사기에서 레위인의 첩을 윤간하고 죽인 사건으로 인해 베냐민지파와 다른 모든 지파가 전쟁을 치른 바로 그 도시입니다. 이 때 기브아출신 베냐민 사람들 중에서도 칠백명의 군사가 직접 전쟁에 참가를 하게 됩니다 (삿20:15). 하지만 결과는 비참했습니다. 베냐민 지파의 참패로 끝난 것이지요. 이 일로 인해 베냐민  지파는 존재가 무의미 할 정도로 줄어 들었습니다. 역사적 시점으로 보면 사울은 기브아 사건 당시 실존했거나 적어도 그의 아버지는 그 전쟁을 목격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그 전쟁 통에 살아난 사람입니다. 기브아 사람들은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의 공공의 적이 되었습니다. 그는 한껏 자신을 낮추며 살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그 마을을 벗어나는 것 조차 그에게 위협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초기 사무엘 앞에서 겸손한 모습을 보인 것도 그가 살아 남기 위한 고육책이였을 것입니다. 또한 양을 찾기 위해 마을을 벗어났을 때 아버지가 걱정을 할 것이라는 생각을 한 것도 그 만큼 그가 불안한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가 왕으로 추대되었을 때 그는 사무엘에게 자신이 가장 미약한 존재라고 스스로를 낮춘 것은 그의 이러한 역사 때문이지 그의 실제적인 겸손이 아니었을 것이라는 겁니다. 그는 끊임없이 살아남기 위해 무언가 자신을 포장해야 했습니다. 주위 모든 일들이 자신을 불안하게 만드는 것들 이었습니다. 그래서 왕이라는 가장 높은 곳에 위치했던 그는 가장 비참한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의 질문은 늘 한 가지였습니다. “내가 과연 안전한가?” “이러다가 망하는 것 아니야?” “누군가는 나의 안전을 노리고 있어!”  등등 자신을 괴롭히는 질문들은 매일매일 자신의 위협 요소들을 제거하는데만 몰두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는 결국 자살이라는 가장 비극적인 죽음으로 자신의 삶을 마감합니다 (삼상 31:4).

나는 안전한가?

왜 앞의 A목사님은 그렇게 자식의 미래를 불안해 하며 이것저것 아들의 미래에 도움이 될 만한 일들은 다 해보는 것일까요? 왜 사울왕은 자신의 왕위를 지키기 위해 정도를 지키지 못하고 자신이 스스로 생각한 미봉책들만 쓰다가 결국은 비참한 종말을 맞이했을까요? 이같은 이야기는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바로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지요. 마음의 평강이 없고, 늘 불안한 마음이 엄습해 안절부절하는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은 늘 미래의 불확실한 것들을 제거하는데 온통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늘 신통치 않습니다. 한마디로 말해 이러한 사람들은 미래의 걱정들을 현재로 끌고와 미리 걱정하는 사람들입니다. 걱정으로 끝이 나는 것이 아니라 그 걱정거리를 자신의 힘으로 없애기 위해 잠도 못자고 노력을 한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노력은 잠시 효과는 있으나 결국은 무너져 내릴 벽에 덧칠을 해대는 것과 마찬가지 입니다.

이런 일은 실제로 비일비재하게 발생합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많은 사역을 맡아 열심히 섬기던 분들이 갑자기 모든 사역을 그만 두고 심지어 교회를 그만 두는 경우를 심심치 않게 목격을 합니다. 그런 분들의 특징은 신앙을 통해 자신이 처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사역을 통해 자신의 신앙을 보이여 한 것이고요.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니까 하나님께서 축복을 허락하였다고 말하는 것을 듣고 자신도 그렇게 될 것을 확신하고 열심히 하나님을 섬겼을 것입니다. 자신이 다니는 교회는 물론 다른 교회, 각종 단체에서 주최하는 집회는 모두 쫒아 다닙니다. 또 수 많은 힐링에 참석을 해보지만 결과가 좋아지기는 커녕 점점 더 악화되는 것을 발견합니다. 자기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는데 자신이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을 경우 결국 하나님께도 배반을 당했다고 생각을 하게 되지요. 물론 겉으로는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저는 직업상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사람들이 삶이 너무 지치고 힘들어 자살 직전에 오는 사람도 있고, 부부간의 관계가 악화될 때로 악화되어 더 이상 회복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 상담실의 문을 두드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 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하나님의 공통점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나는 할만큼 했다.” “이런 상황을 두려워 했기 때문에 그것을 피하기 위해 내가 얼마나 노력을 했는지 아느냐?” 라는 말입니다. 맞습니다. 그 분들은 최선을 다했습니다.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보았으나 백약이 무효였다고 말합니다. 마치 마가복음 5장에 나오는 12년동안 혈우병으로 고생한 여인처럼 말입니다. 그 여인도 자신의 병을 낫게 하기 위해 많은 의원들을 만나 보았으나 효험이 없었고, 그것으로 인해 자기 재산만 모두 허비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자신의 병이 낫기는 커녕 더 중해졌습니다 (막5:26참조). 아마도 예수님을 만날 때 그에게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었고 텅빈 그의 마음은 두려움과 분노와 수치심으로 가득차 있었을 것입니다. 이제는 사람을 만나는 것 자체가 두려웠을 것입니다. 남들이 마치 자신을 보고 손가락질 하는 것 같았을 것입니다. 그는 그런 것을 피하고 정상적인 삶을 원했을 것입니다. 그의 근본을 고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냥 힘만 뺐을 뿐이지요.

아마 미봉책 (彌縫策)이라는 말의 뜻을 모르는 분들은 없을 것입니다. 이 말은 일을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않고 순간의 결함만 때우는, ‘눈가리고 아웅’하는 식으로 일을 처리할 때 많이 쓰는 말입니다. 벽에 금이 가고, 기울어져 더 이상 서 있기 어려운 상태인데도 그 벽에 회를 덧칠해 금이 간 부분만 가린다고 벽이 무너지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 벽에 더 이상 버티지 못해 무너길 때 큰 사고를 부를 수 있는데도 열심이 이곳 저곳 문제가 생길 때 마다 벽에 회칠을 한다고 벽이 온전히 서 있을 수는 없기 때문이지요. 이 때 유일한 해결책은 그 벽을 허물고 다시 쌓는 것입니다. 인간의 불행은 포기하지 못함에서 나오는 것 같습니다. 해보는데까지 해보자. 지성이면 감천이다. 이런 이야기들을 듣고 자란 사람들은 포기하는 것이 곧 실패하는 것이고, 낙오하는 것이란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적당한 시점에 포기할 줄 아는 사람에게 다른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지 전혀 포기를 하지 않고 어떤 것에 집착하여 매달리는 사람은 그 벽이 무너지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의 노력이 헛된 것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어쩌면 하나님은 그 때까지 기다리시고 계실지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더 일찍 만나는 방법은 일찍 포기하는 것입니다. 포기하고 하나님의 지혜를 구할 때, 하나님은 그것으로부터 자유를 허락하실 분 아니라 마음의 평강도 덤으로 주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인간들의 마음 속에는 이미 땀을 흘리고 노력을 해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종교성이 심겨져 있어 늘 결과 없는 헛된 수고들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B2BM]

Comments are closed
단체명: B2B Missions    특수법인 고유번호: 603-82-69556
대표: Chang, Kevin Wooseung    주소: 서울시 용산구 원효로 153, 8층 855호    전화: +82 2-702-1491
B2B Missions © 2016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