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in and abel
March 21, 2015 | by B2B Missions
제자훈련시리즈[3] 제 4강 어떤 것들이 거짓자아를 만들어 내는가? (거짓자아의 이면)–두번째

잘못된 충동 1:  나는 충분한가? (Am I adequate?)

방향이 잘못된 신앙  

언젠가 한 목사님께 이런 고백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저는 모태신앙이었습니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저보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고 자부할 정도로 열심히 교회에 나갔습니다. 주일은 물론이고 교회에서 하는 모든 행사나 새벽기도도 거의 빼먹지 않고 나갔지요. 그리고 나름대로 저 자신은 공부도 열심히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드디어 대학입시가 되었습니다. 당시 본고사가 있었는데 시험지를 받아보니 제가 아는 것이 거의 없었습니다. 보기 좋게 낙방을 했지요. 저는 너무 절망을 했습니다. 제가 원하는 대학에 들어기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동안 내가 하나님께 얼마나 봉사를 하고, 온 마음과, 영혼과, 나의 모든 힘을 다해 하나님을 섬겼는데 결과가 낙방이었으니 말이죠. 원하는 대학을 가기 위해 저는 할 수 없이 재수를 해야 했습니다. 그 때부터 저는 정반대의 삶을 살았습니다. 교회는 근처에도 가지를 않았습니다. 그저 원하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학원과 집을 오가며 대학입시 공부에 매달렸습니다. 결과는 좋았습니다. 제가 원하는 대학 원하는 학과에 합격을 한 것이지요.”

대학에 들어가서도 교회에 나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좋은 직장을 잡고, 세상에서 승승장구를 하게 되자 세상 일에 매달렸다고 했습니다. 그의 마음 속에는 하나님에 대한 분노가 자리 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세상에서 이룰 수 있는 것을 어느 정도 이루었습니다. 그리고 나의 인생을 바라 보았습니다. 그래도 무언가 허전한 것이 저를 지배해 오더라고요, 그것이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예배가 저에게 필요했던 것입니다. 저는 교회로 돌아왔고, 늦은 나이에 신학을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목사가 된 것이지요. 사실 저의 고등학교 시절 모습은 가인의 모습이었습니다. 내가 노력을 하면 하나님이 나를 당연히 칭찬해 주실 것이라 믿은 거죠. 그래서 하나님 마음에 들때까지 나는 ‘이정도 정성으로는 불충분해! 이래가지고는 하나님 마음에 들지 않지! 더 하나님께 정성을 다해야지!’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을 듣지 못하자 (대학에 떨어지자) 그것은 이내 하나님을 향한 원망으로 나타난 것이지요. 그리고 그 원망이 분노로 변했고요. 결국 저는 가인이 그 땅을 떠난 것 처럼 교회 공동체를 떠났습니다.”

가인의 변명   

이 목사님은 자신이 가인과 같았다고 고백하셨습니다. 사실 성경을 읽으면서 가인이 화를 낼만한 이유가 충분히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성경에는 간단하게 가인은 “농사를 하는 자”라고 소개를 하였지만, 농사라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계절에 따라 씨를 뿌리고 정성을 다해 잡초도 뽑아 주고 적절한 때에 추수를 해야 합니다. 그뿐 아니라 시절을 따라 적절하게 비가 내려 주어야 하고 적정한 일조량도 필요합니다.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하면 망치게 되는 것이 농사일입니다. 추수 때의 풍성한 수확을 위해서 농부들은 한 시도 긴장을 늦출 수는 없습니다. 가뭄이 계속되면 말라 죽어가는 농작물을 보면서 자신이 죽어가는 것과 같은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그러다 비가 조금이라도 내리면 기쁨에 넘쳐 들판으로 뛰어 나갑니다. 반대로 너무 비가 많이 와도 홍수로 농사를 망치게 될까 걱정이 말이 아닙니다.  ‘늘 자신이 부족한 것은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합니다. 가인은 그렇게 정성을 다해 지은 곡식으로 제물을 삼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신의 제물을 외면하신 것입니다.

“아니 내가 어떻게 해서 이 제물을 만들었는데, 하나님께서 나의 수고를 다 아시잖아. 일년 내내 고생하는 나의 모습을 보셨을 것 아닌가? 그런데 어떻게 나의 이 제사를 받지 않으실 수 있단 말이야?”

인간이라면 누구나 이런 상황이면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오르지 않겠습니까? 가인도 그랬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원망했을 것입니다.인간들의 당연한 반응입니다. 어떤 분은 설교를 하면서 가인이 인내심이 없어서 자기 동생을 죽였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가인에게 인내심을 요구한다는 것은 무리일 겝니다. 그렇다고 가인이 살인한 것을 정당화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인간은 누구나 이런 상황이면 분노하게 되어 있다는것이지요. 특히 자신의 노력을 통해 무언가를 이루려는 사람들은 더욱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가인이 아벨을 죽이기까지 그의 마음 속을 지배한것이 무엇일까요? 그의 내면에는 어떤 충동이 있었길래 동생을 죽이기까지 했을까요?

자기에게 던지는 질문-“ 정도면 충분할까?”

“이 정도면 충분한가? 아니면 또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 늘 이런 질문을 자기 자신에게 던지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주위에는 너무도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대부분 남들보다 열심히 사는 사람들입니다. 무언가 열심히 하고 있는데도 아직도 부족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지요. 이런 성격의 소유자들은 결국 자기만의 성을 쌓게 마련입니다. 가끔 이런 사람들의 그 내면에서 나오는 그러한 충동들을 통해 이 세상에는 위대한 역사를 만들어지기도 합니다. 물론 세상적인 기준으로 볼 때 말입니다.

가인은 최선을 다해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재물을 만들어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려 하였습니다. 하지만 실패였습니다. 그는 실패의 원인을 밖에서 찾으려 하였습니다. 자신을 동생과 비교하기 시작한 것이지요. 불행은 거기서 출발했습니다. 사실 동생 아벨과 단순히 비교를 하면 가인은 화가 날만도 합니다. 아마도 아벨을 향한 분노는 아무리 노력해도 채울 수 없는 자신 안에 있는 그 무언가가 표출된 것일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께 자신이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을 했는데 보기 좋게 거절당했습니다. 사실 그 거절의 의미는 부적합한 제사에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그의 태도입니다. 자신의 것이 거절 당했을 때 그가 선택한 방식은 자신이 인정받지 못한 이유는 하나님이 아벨만 편애하고 있다는 생각때문이지요. 이제 동생 아벨은 함께 할 수 없는 존재이고 그가 이 세상에 살아 있는한 자신은 하나님의 칭찬을 받는 것은 아예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궁리해 낸 것이 동생을 죽이는 것입니다.

얼마전 한국에서는 두 가전제품 회사간의 소송이 있었습니다. S사가 L를 고소한 사건인데요. 내용은 이렇습니다. 두 회사 모두 한 독일 가전 전시회에 제품을 전시했는데 L사의 직원이 와서 S사 세탁기의 문을 부수었다는 것입니다. 왜 그랬는지 그 내막은 잘 모르겠지만 그것으로 인해 L사는 명성에 엄청난 손실을 가져오게 됩니다. 질투심의 발로인지 아니면 그들 말대로 그냥 눌러 보았는데 문이 부숴진 것인지는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한 것 만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이렇게 본인이 충분하지 못하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남을 해꼬지 해서라도 자신이 인정받으려고 애를 쓰게 됩니다. 여러분은 어떤가요? 자신이 인정받지 못하 것에 대해 화가 나지는 않나요? 그것은 나의 내면 안에 칭찬으로 거짓자아를 만들려는 어떤 충동이 자리하기 때문입니다.

나만의 도시가 필요해!

인간의 만족이란 측량이 불가능 한 것입니다. 특히 완벽을 추구하는사람일 수록, 어떤 것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일 수록 만족이 더 없는것 같습니다. 가인이 동생을 죽인 후에 그는 만족하는삶을 살았을까요? 아닙니다. 이제는 세상 누구도 자신을 만족시킬 수 없었습니다. 급기야 그는 자신을 위해 성을 쌓기에 이릅니다. 성경은 이 부분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가인이 여호와의 앞을 떠나 나가 에덴 동편 놋 땅에 거하였더니 아내와 동침하니 그가 잉태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였더라” (창4:16-17).

우리 성경에는 “성을 쌓고”라고 번역된 부분은 사실 ‘도시를 건설했다’는 의미입니다. 자신만의 도시를 건설한 것이지요. 가인은 왜 자기 만의 도시를 건설했을까요? 그는 도시를 만들기 전 이곳 저곳을 전전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동생을 죽인 그에게 하나님은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 것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창 4:12). 아마도 이곳 저곳에서 정착을 시도하며 땅을 경작하려 했으나 결국은 실패를 했을 것입니다. 땅이 그에게 결코 결실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창 4:12참조).  그는 결국 한 지역을 택해 그 곳에서 정착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아이러니 하게도 그 땅의 이름이 ‘방황’이라는 뜻을 가진 ‘놋’입니다. 방황이라는 땅에 정착하였다는 말은 그가 한번도 마음의 불안을 떨져버린 적이 없음을 암시합니다. 그래서 그가 추구한 것이 자신만의 성을 구축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등진 사람의 특징은 자신들 만의 성을 쌓는다는 것입니다.하지만 이들은 그것에 만족하지 못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인생은 전쟁이고 자신의 삶의 터전은 전쟁터라고 생각을 합니다.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동료이자 적이 됩니다.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자신만의 성을 쌓는다’는 말이 자기라는 성에 갇혀 남들과 소통하지 못하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들도 당연히 남들과 소통도 하고, 어울리기도 합니다. 문제는 서로 어울리는 가운데 자신들이 건설하고 있는 또는 이미 건설한 도시와 자신과 소통하는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도시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비교한다는 점입니다. 그 비교는 결국 질투심을 유발하게 됩니다. “내가 과연 충분한가?”라는 질문은 절대적인 기준이 아니고 상대적인 비교를 의미합니다. 남들과 비교해서 내가 더 나은 상태인가를 판단하는 것이지요.

나도 나의 도시를 건설하고 있지 않은가?

각자 자기 자신을 진단해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나만의 도시를 건설하고 있는 사람인지, 늘 자신이 무엇이 부족하다고 느끼고 있지는 않는지, 그것 때문에 주위의 모든 자원들을 총동원해서라고 좀더 나은 나의 도시를 만들려고 애쓰지는 않는지를 알기 위한 방법이 있습니다.  다음 이야기들이 당신의 이야기로 여겨진다면 아마도 자신의 도시를 만들고 있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사례1) 나는 아직 나의 삶을 누리기에는 너무 이른 것 같다. 아직 아이들이 대학도 들어가지 않았는데 그 아이들 생각만 하면 자다가도 잠이 깬다. 내가 만약 갑자기 건강에 이상이라도 오면 우리 집은 누가 책임을 지지? 사실 아이들과 외식이라도 할라치면 왜 이렇게 나 스스로가 초라해 지는지 모르겠어. 여행도 계획만 하고 취소한 적이 한 두번이 아니고. 정말 아내와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드는 적도 한 두번이 아니다.  그런데 뉴스를 보거나 소위 잘 나가는 사람들만 보면 공연히 마음 속에서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솔직이 나는 나 스스로 최선을 다해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나의 삶을 돌아보면 행복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앞으로도 그런 행복은 오지 않을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은 나를 더욱 불행하게 만든다.  아무리 보아도 나는 아직도 나의 삶을 누릴만한 충분한 것을 갖추지 못한 것 같다.

(사례2) 전국 최고의 교육 일번지로 최근 이사를 간 친구집에 초대되어 갔다 왔다. 마음 한구석 부러움 마음도 들고, 그동안 나는 뭐하고 살았나? 하는 생각이 나를 지배하며 공연히 화가 났다. 사실 그 친구는 학교 다닐 때 나보다 공부도 못하고 늘 내 밑이었는데 남편 사업이 잘되어서 갑자기 부자가 된 것이다. 그 친구는 지금의 위치에 오기까지 자신이 너무 고생했다고 이야기를 하는데 솔직이 내가 보기에는 그 친구가 고생한 것은 하나도 없는 것 같았다. 그 친구는 꽤도 운이 좋은 친구이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오며 밝은 목소리로 “학교에 다녀왔습니다.”라며 인사를 했다. 나는 그 아이들을 안아주었다. 너무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이들이 부모를 잘못 만나서 제대로 된 교육하나 못받는 것 같아 너무도 미안하다. 공연히 속으로 남편을 원망해 본다. “아니 공부만 잘하면 뭘해? 고지식해서 돈도 못벌면서 혼자만 고상한 척하면 뭘하냐고? 나를 이렇게 친구들 앞에서 자신감 없는 존재로 만드는데” 이런 생각을 하니 속으로 분노가 치민다.  그러면서 “참 나는 뭐하고 살았나?” 이런 생각하며 스스로가 너무 초라하게 느껴진다.

(사례3) 나의 주위에 있는 사람을 잘 이용해서 나의 목표를 달성해 가는 것도 아주 중요한 처세술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인간관계가 필요한 것이고 이러한 관계야 말로 내가 살아가는데 가장 도움이 되는 재산이라 생각한다. 친구들을 이용하는 것이 무슨 잘못이란 말인가? 사실 친구 좋다는 것이 무엇인가? 다들 도움을 주고 도움을 받는 것 아닌가? 성경에도 서로 사랑하라고 했는데 이 말씀은 바로 “서로 도움을 주고 도움을 받으라”고 한 이야기이라 생각한다. 특히 교회에서는 성도 간에 도움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을 한다. 내가 필요할 때 도움을 요청했는데 나의 도움을 들어 주지 않는다면 그 사람에게는 진정한 하나님의 사랑이 없는 것이다. 나 혼자 힘으로 내가 계획한 것을 이루어 내려면 사실 불가능에 가깝지 않은가? 그래서 나는 주위의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편이다. 물론 금전적으로 신세를 지는 것도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나중에 잘되어서 더 높은 수익을 남겨 주면 되지 않은가? 굳이 성경말씀이 아니더라도 “누이좋고 매부좋다”라는 속담도 있지 않은가? 사실 내 주의에 있는 이 사람들이야 말로 하나님께서 지금 나의 일을 돕게 위해 보내 주신 분들이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위 세 가지 이야기는 사실 우리들 주위에 있는 평범한 이야기들인지 모릅니다. 첫번째는 자기 스스로가 늘 부족하다고 느끼는 것입니다.이런 사람들은 늘 노력하는 노력형입니다. 어떤 일에든지 최선을 다합니다. 이 사람은 “필요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격언을 믿습니다. 모든 것에 최선을 다하기 때문에 남들보다 더 좋은 업적을 이룰 수 있습니다. 가인의 후예들이 그러했습니다. 그들이 이루어 낸것들이 바로 인류의 문화 문명의 효시라 할 수 있습니다 (창 4:17-22참조). 하지만 그들에게는 평화가 없었습니다. 라멕은 자신에게 부상을 입힌 사람을 죽였고, 심지어 자신에게 상처를 입혔다고 어린 소년을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창4:23). 홀로 이룬 업적으로는 만족을 못합니다. 이 세상에서 자신들의 노력으로 이룬 업적을 조금이라도 건드리는 사람이 나타나면 가차없이 응징을 합니다. 그러면서도 늘 자신이 부족하다고 느낍니다. 문제는 교회를 수십년을 다녀도 변함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목회자들를 포함해서 말입니다.

두번째는 상대적 결핍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의 삶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가 남들과 자신을 비교할 경우가 생깁니다. 사실 늘 비교를 해왔을지도 모릅니다. 이런 사람은 남들 보다 늘 우위에 있어야 하는데 자신보다 더 소위 비교우위에 있는 사람들이 나타나면 힘들어 합니다. 특히, 자기가 그동안 잘 알고 있는 친구나 이웃이 자신보다 나은 위치에 있다고 생각을 하면 그것을 못견뎌 합니다. 이 순간부터 상대방이 이룬 업적을 억지로 깎아 내리려 합니다. 절대 그 사람이 그럴 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 상대방이 노력으로는 나를 쫒아 올 수 없다고 생각을 하는 것이지요. 결국 운이 좋다거나, 누가 도와 주어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하면서 상대방의 업적은 그 사람의 노력보다는 다른 곳에서 원인을 찾으려 합니다. 그것을 통해 조금이라도 위안을 얻으려는 것이지요. “에이, 난 그 정도는 아니다.” 라고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물론 그 정도는 아니겠지요. 하지만 혹시 지금도 주위에 있는 어떤 사람이 갑자기 성공을 했다고 하면, 그 성공의 원인을 그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서 찾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보십시요. 남들이 건설한 도시와 나의 도시를 비교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남들의 도시가 나보다 더 커보일 때 불안해 합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직도 나는 충분하지 못해!”

세번째 사람은 자기 만의 도시를 건설하기 위해 남들도 동원하고자 합니다. 주위의 사람들도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라 생각을 하는 것이지요. 물론 축복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 주위의 사람들을 자기만의 성, 자기만의 영역을 구축하는 수단으로 생각한다는것입니다. 교회에서든 사회에서든 영향력있는 사람을 만나면 마음 속으로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이 분이 그렇게 영향력있는 분이야? 잘 알아 두면 도움이 되겠군.” 사실 이런 생각은 평신도들만의 생각이 아닙니다. 목회자들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어쩌다 유명한 사람들 또는 영향력 있는 사람들이 교회에 출석을 하면 그 분들을 목회에 적극적으로 활용(?)하고자 합니다. 수 많은 경우 초심자들이지만 세상에서 영향력이 있는 분들이면 어느새 교회의 중요한 위치에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교회에 출석한지 얼마 되지 않는 초심자가 잘 알려진 연예인이라는 이유 하나 만으로 강단에 서서 간증을 하고 자신들의 신앙관을 청중들에게 이야기하는 것을 종종 목격합니다. 유명한 대학교수나 기업체의 오너가 교회에 출석을 하면, 금방 교회에서 중책을 맡게 됩니다. 물론 교회의 성장에 많은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목회자들도 할 수 없이 가인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이름을 내고,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하려 합니다. 물론 하나님의 사역을 한다고 하지만 결국은 자기 안에 있는 자기 성을 쌓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우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가 피로 사신 사람들의 모임이 아니라 목회자가 열심을 내어서 만들어 낸 성과물, 업적이 되고, 그 안에서 자신을 높이게 됩니다. 마치 가인이 자신이 건설한 도시를 자신의 아들의 이름을 따서 ‘에녹’이라 이름한 것처럼 말입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그런 가치관을 가지고 목회를 하고 있다면 많은 평신도들도 내면에 있는 좋지 못한 충동들(bad urges)의 지배를 받는 것은 당연합니다. 우리의 조상 아담이 범죄함으로 인해 우리 인간내면의 성향이 그런 것이니까요. 사도바울은 자신의 내면 안에 있는 문제에 대해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 (롬 7:8).

사도바울은 자신의 내면 깊숙한 곳에 ‘각종 탐심’all kinds of covetousness이 있다고 솔직하게 고백을 합니다. 여기서 우리말로 탐심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원래는 헬라어Greek로 에피듀미아 (ἐπιθυμία)입니다.  이 단어는 간절한 바램, 열망  등을 나타내는 단어 입니다. 사실 우리 말로 번역된 탐심은 부정적 의미로만 우리에게 다가 오지만 실제로 이 단어는 인간들의 입장에서 볼 때는 오히려 긍정적인 의미로도 사용되었습니다. 예를들어 예수님은 누가복은 22장 15절에서, “이르시되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라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서 “원하고 원하였노라”라고 번역된 부분에 이 단어가 두번이나 연속해서 사용되었습니다. 이 단어는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소망을 설명할 때도 사용되었습니다. 다시 사도바울이 말한 ‘탐심’의 문제로 돌아가 봅시다. 그는 죄를 계속해서 짓고자 하는 욕망을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무언가 이 세상에서 잘되려고 하는 욕망을 말합니다. 여기에는 하나님께 자신의 노력의 결과를 보여드리고자하는 욕망도 포함됩니다. 사실 사도바울에게는 그것이 많았습니다. 그것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기까지 하였으니까요.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또는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면서 무언가 업적을 하나 하나 만들어 가고자 합니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하나님을 섬기고자 합니다. 하지만 마음 속으로는 자신의 업적들을 하나 둘 쌓아갑니다. 기업들의 회계에서 사용하는 대차대조표에 ‘자산’으로 기재하는 것 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잘못된 충동으로 말미암아 쌓여진 그 자산으로 자기만의 자기이름으로 된 성을 만들어 가는것입니다.

가인과 같은 부류의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의 능력으로 자기가 만족할 때까지 계속해서 노력을 하는 성향을 지니고 있습니다. 스스로 적합한 수준을 만들어 놓고 그곳에 이르려고 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인간은 무엇에도 만족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인간 내면에 숨겨져 있는 ‘선과 악’이라는 것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늘 상대적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보다 나은 사람이 있으면 못견뎌하고 질투심을 느끼는 것은 부정적인 면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승부욕’이라는 이름으로 포장이 되면 이런 성향이 참 좋게 들립니다. “그 친구는 승부욕이 강해!” 이렇다는 것은 항상 자기 노력을 통해 남을 이겨야 하고 남 우위에 서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에게 쓰는 말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 만족이 없습니다. 늘 부족한 것이지요. 그리고 자기의 것을 지키고 스스로가 만족하기 위해 ‘자기만의 성’을 구축하게 됩니다. 가인도 그랬습니다. 아담의 후손들인 현대를 사는 우리들 가운데에도 가인과 같이 자기만의 도시를 건설하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목표를 정하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그리고 목표를 이루지 못하게 될 것 같은 두려움, 자기 보다 앞서 가는 사람, 나은 사람, 많은 것을 가진 사람들에 대해 질투와 시기심을 억누르며 살아갑니다. 가인의 후예들은 자신만이 정한 인생의 기준을 맞추기 위해 끊임없는 노력을 경주했습니다. 사람들을 만나도 자신에게 필요한 사람들만 만납니다. 그 사람이 자신의 필요를 충족시켜줄 사람이라 생각하면 어떤 방법으로든 그를 이용하려 합니다. 하지만 더 이상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때에는 그를 미련없이 떠나게 되는 것이지요.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닙니다. 오히려 더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조차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이용할 수 있는 대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니까요. 앞에서 예를 든 목사님의 고등학교 때 신앙생활처럼 당신도 어쩌면 당신만의 도시를 만들기 위해 모든 것이 존재한다고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Comments are closed
단체명: B2B Missions    특수법인 고유번호: 603-82-69556
대표: Chang, Kevin Wooseung    주소: 서울시 용산구 원효로 153, 8층 855호    전화: +82 2-702-1491
B2B Missions © 2016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