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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cember 20, 2014 | by B2B Missions
송아지를 만드는 사람들

이 세상 신의 중심에는 풍요가 있다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는 하나님에 대한 배반과 징계의 역사로 점철되어 있다. 그들은 약속의 땅인 가나안 땅에 들어가 하나님을 섬긴 시절보다 하나님을 떠난 시기가 더욱 많고 그로인해 하나님의 혹독한 하나님의 훈련과정을 겪어야 했다. 하지만 그들이 사십년 광야생활을 마치고 가나안에 들어가서 그 속의 토착종교와 밀착해서 그것으 섬기는 것이 하나님을 배반한 것이 그들의 배반의 시작이 아니다. 이미 광야에서부터 아니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할 때부터 그들은 바알과 유사한 풍요의 신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것을 섬겨 왔다.
고대 근동지방에서 암소나 숫송아지는 힘과 다산 또는 풍요의 상징이었다. 특히 이스라엘 민족들이 모여 살았던 이집트 고센지방에서는 멤피스의 ‘아피스’(Apis) 황소 또는 헬리오폴리스의 ‘므네비스’(Mnevis) 황소를 다산을 상징하는 상징으로 여겨지고 숭배되어 왔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지역에 살면서 이를 섬기거나 적어도 이에 익숙해 있었다.
그런 그들이 이집트를 나와서 시내산 까지 왔을 대 모세는 하나님의 율법을 받는 동안 시내산에 머무르고 있었다. 모세를 기다리다 지친 백성들은 모세의 형 아론을 불러 자신들을 인도할 신을 자신들을 위하여 만들어 달라고 요구를 한다. 그러자 아론은 (기다렸다는 듯이) 금 귀고리를 가져 올 것을 명한다. 아론이 주저했다거나 백성을 설득했다는 이야기는 전혀 없다. 아마도 아론은 백성들의 생각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렇게 하여 그들은 모세가 없는 동안 엄청난을 일 저지르고 만다. 그들의 신으로 금송아지를 만든 것이다. 그리고 백성들은 그 금송아지를 향해 이렇게 외친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로다” (출 32:4).

그들은 이 금송아지를 향해 화목제물을 드리고 뛰놀며 잔치를 하였다. 공식적으로 나타난 이스라엘 민족의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도전이었다. 모세는 이후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을 새긴 돌판을 들고 그들 앞에 서 있었다. 돌판에는 다음과 같이 계명이 새겨져 있었다.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Exo 20:3-7).

그들에게 이 율법이 선포도 되기 전 이미 그들은 다른 신을 만들었으며, 형상을 만들어 그것을 섬겼으며, 그것을 향해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
이들은 행동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가나안에 정착해서는 그곳의 풍요의 신인 바알을 본격적으로 섬기기 시작한다. 사사기 2장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사 2:11). 바알은 가나안 땅에서 가장 유명한 신으로 당시 다신교를 믿었던 가나안 거민들의 신 중에서 순위가 그다지 높지 않은 신이었다. 당시 가나안 거민들은 신의 파워에 따라 계보를 가지고 있었으며 신들의 모임에서 가장 높은 순위를 차지한 신은 ‘일립’(Ilib)으로 이 신은 신들의 조상으로 명명되기도 하였다. 그 다음은 ‘엘’(El)이라는 신으로 엘은 피조물의 창조자이며 모든 신들을 만들었고 인류의 조상이 되기도 하였다. 그는 황소 (bull)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었다. 이후 북이스라엘의 여로보암 왕은 여호와를 상징하기 위해 황소를 만들었다 (왕상 12:28). 엘이라는 단어가 하나님을 상징하는 엘과 발음이 동일해 이스라엘 사람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쉽게 황소의 이미지를 갖게 하였다. 그리고 세번째 신은 ‘다간” (Dagan)이고, 다음 네번째가 ‘바알’(Baal)이었다. 바알은 이 땅을 지배하는 신으로 땅을 풍요롭게 한다고 믿었다. 이 바알은 이후 이스라엘 민족을 유혹하는 가장 큰 신이 되었다.

풍요는 하나님의 약속이다?

신명기 28장은 모세가 이제 막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고자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주고 있다. 먼저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하면 복이 임할 것을 이야기 하고 있고, 그 복은 나라가 강성해지고, 풍요로와 질 것이고, 이름이 높아질 것 (명예롭게 될 것)을 이야기 하고 있다 (신28:1-14). 반대로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게 되면 저주가 임할 것인데, 가난하게 되고, 질병에 걸리게 되고, 남들의 노예가 되고, 다른 신들을 섬기게 될 것을 경고하고 있다 (신28:15-68).
이 말씀만 놓고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온전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을 따르면 풍요를 누리고 건강하고 강성해지고 명예롭게 될 것을 약속하고 계신다. 따라서 풍요는 하나님의 약속이며 하나님은 풍요의 신이 된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 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땅에서 이야기 하는 풍요의 신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풍요의 약속은 분명히 다르다. 이 세상의 풍요는 보이는 것, 물질적인 것을 강조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풍요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 안에서의 풍요를이야기 하고 있다. 이 세상의 풍요는 이 땅에 소망을 두게 한다. 하나님의 풍요는 이 땅이 아닌 영원한 나라에 소망을 두도록 한다. 이 땅의 풍요는 나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풍요는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할 때 결과적으로 따라 오는 것이다.

현대판 송아지들

요즈음 기독교는 다시금 현대판 송아지 숭배와 싸워야 할 것 같다. 경제적 풍요, 세상의 명예, 이 세상에서의 건강한 삶이 하나님의 은혜희 표본처럼 인식되어 교회 내에 깊숙이 파고 들어와 기독교의 기본 사상을 지배한지 오래 되었다. 사람들은 분별력을 상실하여 하나님의 뜻과 사람의 뜻을 구분 못하고 이 세상에서 잘되는 것이 곧 하나님의 뜻이고 잘못되면 하나님의 저주라고 생각하는 모세 율법에서 이야기한 생각이 지배를 하고 있다. 그래서 ‘가문에 흐르는 저주’라는 말이 아무런 거리낌 없이 교회에서 사용되고 구약의 권선징악적인 하나님이 다시 살아와 은혜와 사람의 하나님 자리를 대신한지 오래 되었다.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생각하는 복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각한 복과 별 반 다를 것이 없다. 믿는 사람들은 건강해야 한다. 믿는 사람들은 남들에 비해 명예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 믿는 사람들이 경제적으로 더 성공한다. 믿는 사람들이 뛰어난 업적을 남길 수 있다. 전쟁을 하여도 믿는 나라가 승리한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도와 주시기 때문이다.
첫째, 믿는 사람들은 건강해야 한다. 설령 질병에 걸리더라도 하나님께서 병을 고쳐 주실 것을 믿으면 하나님은 우리의 병을 치료해 주신다. 그 근거는 너무도 많다. 예수님은 수 많은 사람들을 고쳐 주셨으며 귀신을 좇아내고, 문둥병자들과 중풍병자들, 십이년간 혈우병으로 고생하던 여인을 고치셨다. 사소한 감기 정도가 아니다. 당시 암이라는 병명이 없어서 그랬지 당연히 암도 고치셨을 것이다. 물론 죽은 자도 살리셨다. 신약성경 복음서를 보면 마치 예수님은 대단한 의사이셨음에 틀림이 없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이렇게말씀 하신다. 소위 많은 치유사역자들이 이 말씀을 인용하여 마치 예수님께서 믿는 자들에게 준 표적인 것 처럼 이야기를 하고 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찌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 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막16:17-18).

과연 이 말씀이 그런 말씀일까? 그것보다 먼저 이 말씀이 예수님이 한 말씀인지 아닌지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마가복음 9절 이후의 말씀은 후대에 추가된 것으로 보는 것이 정설이다. 하지만 추가 되었든 아니든 이 말씀을 해석을 해보자. “믿는자들에게는 이러한 표적이 따르리니”라는 “믿는 자들은 이러한 표적들이 미래에 (반드시) 따를 것이다”라는 의미이다. 다시말해 ‘이러한 표적이 따르지많으면 믿는자가 아니라’라는 말과도 같다. 어떤 표적인가? 귀신을 쫒아내게 된다. 귀신들린 믿는 사람들이 어디 갈 필요가 없다. 그가 믿는 자라면 쫓아 내면 된다. 새로운 방언을 하게 된다. 여기서 정확히 어떤 방언을 의미하는지는 모르지만 자신이 하는 언어 외에 다른 언어를 사용하게 된다. 뱀을 반드시 잡게 된다. 왠지는 모르겠다. 이것도 미래에 반드시 일어날 일로 이야기 하고 있다. 무슨 독이든지 만약 마셨다고 할지라도 그 사람은 해를 받지 않는다. 그러니까 독으로 죽는 사람은 없다. 마지막으로 믿는 사람들은 병을 앓고 있는 환자의 머리에 손을 (반드시) 얹게 될 것이고, 그러면 그 환자는 (반드시)낫게 될 것이다. 이 정도 되면 더이상 추가적인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사실 성경의 무오설 때문에 아직도 마가복음에 그대로 수록되어 있는 이 부분이 믿는 자들이 치유를 할 수 있는 근거로 했다면 성경을 무리하게 적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둘째, 믿는 사람들은 부자로 살아야 한다. 적어도 열심히 살면 풍요로울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성취해 낼 수 있다. 세계에서 제일 많은 성도수를 자랑하고 있는 한국의 여의도 순복음교회에서 조용기 목사님은 소위 삼박자 구원을 슬로건으로 하여 성도들에게 메시지를 전했다. 삼박자 구원의 근거는 바로 요한 3서 2절 말씀이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요삼 1:2).

이 편지의 수신자는 가이오(Gaius)라는 성도였다. 위 말씀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굳게 서 있는 가이오의 모든 일이 잘되고 건강하기를 기도하고 있는 내용으로 편지의 통상적인 인사말이다. 다시 말하면 “은혜와 평강이 있을찌어다”리고 축복한 것과 동일한 의미이다. 하지만 이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은 영혼이 잘되고 (이미 가이오의 영혼은 잘되고 있다), 범사가 잘되고, 강건하기를 기도하고 있다. 그렇다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서신서의 인사 말대로 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적극적 사고가 이 세상을지배한다. 기독교도 예외는 아니다. 수 많은 기독교 인들이 신앙심과 적극적 사고를 구분하지 못한다. 적극적 사고를 통해 성공할 수 있다는 풍요의 신의 메시지가 점점 더 순수한 기독교 신앙을 잠식해 가고 있다. 그래서 결국 세상의 가치가 교회와 성도들을 점점 그들의 지배영역안으로 수용해가고 있다. 매주 교회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은 매사에 적극적인 생각으로 임해야 하며 그러면 이 세상에서 소위 풍요를 누릴 수 있다고 설파한다. 이 같은 주장을 뒷바침하는 성서적 증거의 대표적인 말씀으로 마가 복음 9장 23절이나 빌립보서 4장 13절이 주로 인용되고 있다. 하지만 과연 그들이 주장하는 이 두 말씀이 적극적 사고의 근거가 될 수 있을까? 먼저 마가복음 9장 23절 말씀부터 살펴보자.

믿는자에겐 능치 못한일이 없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막9:23).

마가복음의 이 말씀은 갈릴리 사역을 다 마치신 예수님께서 제자 3명을 데리고 변화산으로 올라가셔서 변화된 모습을 보여 주는 사이 마을에 남아 있던 제자들이 한 귀신들린 아이의 귀신을 쫒아내지 못한 것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귀신이 예수님을 보자 아이를 또 거꾸러 뜨린다. 아버지는 예수님께 이렇게 사정을 한다.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 (마 9:22).

이 말씀은 예수님게서 어떤 일이라도 할 수 있거든 그 방법을 이용해서 도와달라는 간청이다. 9장 23절의 대답은 바로 이 간청에 대한 것이다. 즉, “할 수 있거든”은 아이의 아버지가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이라고 조건을 사용한 것을 그대로 말씀하신 것이고 예수님의 진짜 대답은 그 다음이다. “믿는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라고 말씀하시고 그 아이를 고쳐준다. 물론 그 사이에 아이의 아버지가 자신이 믿으니 믿음이 없는 것을 도와 달라고 이야기하는 부분이 나오지만 그것 때문에 예수님께서 아이를 고치신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중요한 것은 28절과 29절에 나오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28절과 29절에서 매우 중요한 말씀을 제자들에게 한다. 이제 제자들과 예수님의 대화내용을 살펴 보기로 하자.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 내지 못하였나이까” (마9:28).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마 9:29).

마치 선문답 같은 이야기로 마무리 된 여기에서 이 전체 에피소드의 해답이 들어 있다. 마가복음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첫부분은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 (1:1-8:21), 둘째부분은 가이샤랴 빌립보지방을 거쳐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길에서 일어난 에피소드들 (8:22-10:52), 마지막 부분은 예루살렘에서의 사역 (11:1-16:8)으로 나눌 수 있다. 예수님은 갈릴리 사역에서 수 많은 설교와 이적을 통해 자신이 하나님 아들이심을 스스로 드러내셨다. 그리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에 예수님은 그동안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드러내는 사역에서 제자들을 훈련하는 사역으로 사역의 방향을 전환하신다. 그리고 마지막 사역에서는 이 땅에서 오신 목적을 이루기 위해 십자가를 지신다. 따라서 에피소드는 예수님이 제자들을 훈련하는 과정에 생긴일이라는 점을 명시하면서 이 이야기를 해석해 나가야 할 것이다. 마가복음 두번째 부분의 전체 구조를 보면 다음과 같다.

A: 눈 먼사람을 고치심 (8:22-26)
B: 제자도에 대한 첫번째 가르침 (8:27-9:1)
C: 천국의 보여주심 (9:2-8
D: 제자들과 교회의 고난 (9:9-29)
C’: 천국을 설명하심 (9:30-10:31)
B’: 제자도에 대한 두번째 가르침 (10:32-45)
A’: 눈먼사람을 고치심 (10:46-52)

저자인 마가는 예수님께서 가이샤라 빌립보지방을 거쳐 예루살렘으로 올라기시는 중에 생긴 에피소드들을 당시 특유의 문학적 기법인 교차배열법(chiasmus)을 이용해서 설명하고 있다. 마치 액자처럼 처음 시작과 마지막 마무리에 눈먼 사람을 고치는 사역을 배치하고 있다. 그리고 사역을 설명하는 중간에 바로 오늘의 에피소드를 넣어서 설명하고 있다. 분명한 것은 예수님의 관심은 제자들과 교회에 있었다. 따라서 그동안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서기관들이나 수 많은 군중들은 이 에피소드에서는 중요한 역할을 하지 못한다. 특히 아이가 온전해진 이후에도 군중들이나 함께 있던 서기관들의 반응은 설명하지 않고 있다. 왜냐하면 마가는 철저하게 제자들과 당시 예수님 이후에 환란과 핍박의 시기를 보내고 있는 교회에 촛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갈릴리 사역에서와는 달리 예수님은 제자들을 훈련을 시작하면서 고난과 죽음을 말씀하신다. 제자가 되는 것은 “주는 그리스도이시며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라는 고백으로부터 출발한다. 예수님 만이 유일한 우리의 주님이시고 우리의 구원자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은 마가가 복음서를 쓴 당시 기독교인들이 핍박을 받은 가장 핵심적인 사유였다는 사실을명심해야 한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의 주가 되신다”는 생각과 고백을 한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할 수 도 있는 심각한 상황이었다. 예수님의 제자의 삶을 산다는 것은 자신의 목숨까지 주를 위해 내어줄 각오를 해야 했던 시기였다.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의 고백 이후에 대해 이렇게 제자들에게 이야기 하신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막8:34-35).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 셋만을 데리고 변화산으로 올라가신다. 변화산 사건이후 벌어진 이 일은 당시 예수그리스도를 유일한 주로 인정하고 다른 어떤 이방신들을 배격하며 심지어 로마황제의 신격화에 동의하지 못하던 그리스도인들은 엄청난 핍박에 직면해야 했다. 그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었다. 어떤한 이적도 그들 가운데 일어나지 않았다. 그들로서는 답답하게 하늘만 처다보고 있는 형국이었다. 로마제국의 황제숭배라는 엄청난 벽 앞에서 기독교가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제자들의 각종 신비적이고 초자연적인 이적 때문이 아니라 그 상황에서도 주를 부인하지 않고 신앙을 온전히 지켜나간 것 때문이다. 예수님이 오시면 모든 상황은 종료된다. 우리의 고난도 끝이 난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기도하라. 기도에는 환란을 능히 견디게 하는 힘이 있다. 예수를 부인하고 생명을 부지하고 싶은 생각이 드느냐? 믿음이 흔들릴 그 때 기도하라! ”

“적극적 사고를 가져라. 내가 너의 모든 문제들을 해결해 줄 것이다. 조금만 견디면 너희들의 상황은 좋아질 것이다. 그러니 너희들의 생각을 좀더 긍정적이고 발전적인 생각으로 바꾸어라. 그러면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너희의 모든 것을 바꾸어 줄 것이다. 적극적 사고를 통해 너희들의 운명은 바뀔 수 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가르치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상황을 좋게 만드시는것이 아니다. 그리스도로 인해 고난을 받고 심지어 죽으라고 가르치고 계신다. 그것이 제자의 삶을 살아 가는 우리에게 당연한 결과이다.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당연히 고난을 받아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롬8:17) 그러면서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롬 8:18).

현재 복음때문에 당하는 고난이 있는가? 그리스도를 생각함으로 참으라. 그리고 우리는 부활이후 장차 나타날 영광을 이해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이자 예수님의 제자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수 있느니라” (빌4:13).

빌립보서는 A.D.62년경 사도바울이 로마감옥에 갇혀 있을 때 빌립보 교회에게 보낸 편지이다. (어떤 학자는A.D.53년에 에베소 감옥에서 썼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사도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고난 중에도 그들의 믿음의 진보를 칭찬하는 한편 하나님과 본체이심에도 불구하고 종의 형체를 가지신 예수그리스도를 본받아 서로 낮아짐으로써 교회가 하나가 될 것을 권면하고, 오직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을 통해서만 하나님 안에 올바른 신앙을 가질 수 있음을 설파하며, 행함을 통한 믿음의 성숙을 가르치고 있다. 위 본문은 빌립보서 4장 10절부터 시작되는 빌립보교회의 실질적인 도움에 대한 감사와 사도바울의 물질관을 설명하고 있는 부분이다. 13절은 동떨어진 말씀이 아니라 11절부터 이어지는 말씀의 마지막 부분으로 보야야 한다. 따라서 13절 말씀을 온전히 이해하기 이해서는 11절과 12절을 함께 읽어 주어야 한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빌 4:11-12).

사도바울은 궁핍하기 때문에 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사도바울은 경제적 형편과 무관하게 자족하는것을 배웠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사용돈 궁핍이라는 단어는 헬라어 원어로 ‘후스테레시스’(husteresis)로 경제적으로 가난한 상태를 의미한다. 성경에는 단 두번만 사용되었는데 다른 한곳은 마가복음 12장 44절에 예수님께서 과부가 두렙 돈을 헌금한 것을 언급하시면서 “저희는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셨더라” 라고 말씀하셨을 대 구차하다라는 단어가 바로 이 단어와 동일한 단어이다. 사도바울은 빌립보서 4장 11절을 통해 자신이 그러한 상태임을 간접적으로 시사하고 있다. 12절로 넘어가면 자신이 배도 고파보았으며 충분히 먹어도 보았고, 비천에 처해보기도 했고, 풍부한 것을 경험도 했으므로 경제적으로 어떤 사정에 있는지 그것을 견딜 수 있는 비결을 배웠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나서 한 말이 바로 13절 말씀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자신에게 능력을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 (배고품, 배부름, 궁핍, 풍부)을 할 수 있다고 이야기 하고 있다. 니는 모든 것을 견딜 수 있다는 말로도 해석될 수 있다.
이 말씀을 만약 우리가 능력주시는 자안에 있으면 모든 것을 달성가능한 것으로 해석한다면 정말 사도바울에게 큰 죄를 짓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이는 적극적 사고라기 보다는 주님 안에서 겪게 되는 모든 상황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이고 그 상황에서도 기뻐하는 사도바울의 신앙을 옅볼 수 있는 것이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적용해야 할 것은 현재 상황에 내가 감사하고 있느냐?는 질문을 스스로 던지는 것이다. 파산으로 거리에 내몰릴 지경이라도 감사할 수 있느냐? 갑작 스럽게 찾아 온 말기암이란 선고 앞에 담담하게 감사하고 기쁨으로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느냐? 사춘기에 있는 아이가 집을 나가 소식이 끊긴 채 돌아오지 않아도 감사하는가? 복음을 전하러 갔는데 죽도록 고생만하고 한 영혼에게도 전도를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 올 때에도 감사하는가? 그러한 상황을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넉넉히 이길 수 있는가?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들을 던져 보아야 한다. 그것이 이 말씀을 제대로 적용하는 것이다. (www.b2bm.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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