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선
April 6, 2015 | by B2B Missions
[성경올바로이해하기시리즈1] 행위의 결과인가? 의도인가? (막7:1) (마가복음 19)-두번째

사건의 전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도발적 질문(7:5)

몇몇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는 것을 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게 따지듯 물었습니다.

“어찌하여 당신의 제 자들은 장로들의 유전을 준행치 아니하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나이까” (막 7:5).

이 말씀을 정확하게 번역하면 “왜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느냐? 그들이 [지금] 더러운 손으로 빵을 먹고 있다!”입니다. 이들의 지적에 몇 가지 집어 보아야 할 의문이 듭니다. ‘이들이 언제부터 여기에 있었길래 몇몇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먹는 것을 보았느냐?’라는 의문과 ‘정작 손을 씻지 않고 먹은 것은 제자들인데 왜 이들이 예수님에게 화살을 돌리고 있느냐?’ 하는 점입니다.

먼저 이들이 제자들의 행동을 면밀히 살피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2절에는 “그의 제자 중 몇 사람이 부정한 손 곧 씻지 아니한 손으로 떡 먹는것을 보았더라”라고 기록이 되어 있는데 여기서 보았더라고 번역된 부분은 일반 동사가 아니라 분사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보았다라는 단어는 1절에 그들이 앉아 있었다를 꾸며 주는 말입니다. 즉, 그들은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먹는 모습을 유심히 살펴보면서 앉아 있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들이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먹는 것을 우연히 본 것이 아니라 이미 계획을 하고 어떤 증거를 확보하기위해 제자들을 관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들이 제자들을 감시하려 했을까요? 바로 예수님을 함정에 빠드리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두번째 의문, 즉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먹었는데 예수님에게 따지는듯한 질문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들이 정상적으로 장로들의 전통을 강조하려면 제자들을 나무라야 정상인 것이지요. 결국 이들이 예수님의 말을 통해 예수님을 해꼬지 할 증거를 수집하고자 예수님을 향하여 질문을 던진 것이지요.

사건의 위기: 예수님의 반응 (7:6~9)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께 따지는 그 질문에 대해 예수님은 성경말씀을 근거로 하여 오히려 그들의 소위 ‘장로들의 전통’이라고 하며 그들이 ‘전통’을 지키는 것을 문제삼고 나섭니다. 그것이 겉으로만 잘보이려고 하는 외식이라는 것이지요. 사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주의를 주어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미연에 방지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말이지요.

“나는 솔직이 장로들의 전통이라는 것을 반드시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데 그래도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 앞에서는 지키는 척이라도 해서 분란이 일어나는 것을 막아야 하지 않겠니? 내 체면도 있고, 또 우리 공동체가 공연한 문제에 휘말리는 것도 좋지 않으니 이런 저런 눈치를 봐서 문제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지 좋지 않겠니?”

이렇게 사전에 예방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또, 비록 문제가 발생하여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면 분쟁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그들에게 도전적인 말이 아닌 편안한 말로 대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반응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마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이런 이슈를 제기하기를 기다렸던 것처럼 즉각적으로 반응하십니다. 조금은 과정하자면 “당신들 오늘 재대로 걸려 들었다!”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들에게 반응하십니다. 6~7절을 읽으십시오.

6 가라사대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7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막 7:6-7).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너희 외식하는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외식하는 자라는 말은 겉과 속이 다른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러면서 이사야서 29장 13절 내용을 인용하십니다. 그들은 입술로는 하나님을 공경합니다. 외견상 나타나는 삶은 누구보다 하나님을 위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외적인 삶은 자신의 내면의 교만이나 자랑을 가리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입니다. 보이는 것 만으로 하나님을 섬기다 보니 외적인 규율을 만들고 지키는 것으로 하나님께 대한 일을 다했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밖으로 드러나는 일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의도가 불순하다는 것이지요.

사실 예수님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나무라시기 위해 인용한 이사야서 말씀은 B.C 730년 경에 쓰여진 글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예수님 앞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는 그들에게 직접적으로 해당하는 말이 아닐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외식하는 이들 모두에게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말씀으로 이 말씀을 하십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그리고 오늘날 이 말씀을 보는 우리에게는 어떻게 적용되어야 할까요?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의도를 정확하게 간파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자신들을 치장하는데 사용하였고, 그들이 제자들이 장로들의 유전을 지키지 않고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먹은 것을 지적하면서도 자신들은 율법적으로 우월한 존재이고 예수님을 포함한 제자들은 율법폐기론자로 몰고 가려는 의도 말이지요. 더 나아가 그런 행위를 가지고 예수님의 약점을 잡아 깎아 내리려고 하는 잘못된 생각을 정확하게 집어내신 것입니다.

우리들은 어떠한가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자신들을 발견하고 자신들은 성령님의 도움이 없이는 어떤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온전히 주님의 도우심에 의존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연구한 삶의 방식으로 어떻게 해서든 각종 전통과 도덕적 삶을 살아내려 애를 쓰고 있지는 않은지,  또한 그렇게 살지 못하는 사람들을 정죄하고 비판하지는 않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비판하면서도 어느새 우리도 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모습을 갖고 있지는 않은지 말이지요. 이사야서 29장 13절의 말씀은 어쩌면 오늘날 성령님이 우리를 외치시는 소리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계속해서 8절과 9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8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유전을 지키느니라  9 또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유전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 (막 7:8-9).

예수님의 이 말씀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은 ‘하나님의 계명’과 ‘사람의 유전’를 양립할 수 없는 것으로 보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의 유전 (여기서는 장로들의 전통)과 하나님의 계명 을 동시에 만족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말을 들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억울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을 좀 더 잘 섬겨 보려고 제도도 만들고 규칙도 만들었지 자신들의 유익을 위해 만든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도 자신들의 그러한 기특한(?) 생각들은 완전히 무시하고 오직 둘을 대립적인 관계로만 바라보는 예수님이 참으로 야속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아주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너희 유전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

많은 사람들은 성경의 가르침대로 살려고 하고 그대로 실천을 하려고 합니다. 설교를 들으면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칩니다. 그것 또한 사람의 교훈으로 보아야 할까요?  하나님의 계명과 사람의 유전을 어떻게 구별해 낼까요?참으로 곤란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 기준은 의외로 간단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 두가지로 간단하게 정리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율법이 말하는 모든 정신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 율법의 정신은 항상 자신을 돌아보게 합니다. 자신이 지금 행하는 그것이 정말 자신을 위한 일종의 영적스팩쌓기의 일환인지 아닌지는 본인만이 알고 있습니다. 영적스팩을 쌓는 사람의 특징은 자신의 노고가 제대로 알려지지 않으면 감정적으로 ‘섭섭한 마음’이 들고, 반대로 남들이 칭찬이라도 하면 ‘교만한 마음’과 자랑하고 싶어지는 마음’이 들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아무리 성경에 기초한 행위라 할지라도 그것을 행하는 사람은 ‘사람의 교훈’으로 잘못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건의 절정: 고르반 (7:10~12)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향한 예수님의 질타는 이제 그들의 위선적인 실제의 삶의 문제은 언급하심으로서 절정에 달합니다. 7장 10절~12절을 읽으십시오.

10 모세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고 또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였거늘 11 너희는 가로되 사람이 아비에게나 어미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  12 제 아비나 어미에게 다시 아무 것이라도 하여 드리기를 허하지 아니하여” (막7:10-12).

예수님은 모세의 율법을 구체적으로 거론하며 이들의 위선을 질타하십니다. 예수님이 인용하신 모세율법은 십계명 중 다섯째 계명인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한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출 20:12, 신 5:16)입니다. 이 계명에는 부정적인 개념이 없는 긍정적인 면만 나타나 있습니다. 즉,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것에 대한 벌은 없고 부모를 공경한데 대한 보상만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부모를 ‘훼방하는 자’에 대한 내용까지 겸하여 말씀하고 계신겁니다.  이 말씀은 출애굽기 21장 17절과 레위기 20장 9절에 그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그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 지니라” (출 21:17).

“무릇 그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 그가 그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였은즉 그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레20:9).

출애굽기나 레위기에서 ‘저주’라는 말의 히브리어는 ‘콰랄’ (קלל)은 여러가지 의미를 내포하는 단어인데 출애굽기나 레위기 본문에서는 적극적으로 부모에게 입으로 저주의 말을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단순이 부모를 잘 돌보지 않는 경우에는 해당이 되지 않았던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모세의 율법을 해석하시면서 좀 더 광범위하게 적용을 하십니다. 즉,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이 부모들에게 하는 행태를 지적하시면서 그 행위가 부모님을 향해 직접 내밷는 저주의 말과 같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지적하신 유대인들의 행태는 이런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성전에 헌금을 하고 나서 부모에게 가서 부모님께 드려야 할 것을 성전에 헌금으로 드려서 (고르반: 하나님께 헌금으로 드림) 더 이상 부모님에게 드릴 의무가 없어졌다고 말하는 것을 부모에게 저주의 말을 한 것으로 해석하신 것입니다. 이는 부모에게 더 이상 드릴 의무, 즉 부모공경의 의무를 다했다고 선언을 하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이러한 선언을 부모를 저주한 것으로 판단하신 것입니다.

이 예수님의 말씀은 이 에피소드의 전체 맥락과는 조금은 동떨어진 것처럼 보입니다. 특히 이사야서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사람의 교훈을 위해 하나님의 계명을 버렸다고 말씀하신 것과는 잘 어울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하신 열개의 계명은 사실 상 하나의 계명입니다. 사람들이 임의로 그것을 구분해서 그 경중을 따질 수가 없는 것이지요. 사람들은 자신들의 신앙심이 높은 것을 보여 주기 위해 성전에 헌금을 하면서(고르반), 정작 돌보아야 할 부모에게 가서는 하나님께 드렸다는 말로 대신하는 것은 부모를 공경하지 않았을 뿐만니라 더 나아가 부모를 저주하는 말로 해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들은 하나님을 위한다고 하면서도 정작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그 목적은 훼손한 셈이 됩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는 열심히 다니고 교회사역은 열심히 하면서도 시간을 내어 부모님을 찾기 위해 시간을 내는 일은 등한이 하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예배나 교회는 삶의 일부분이 되어 있지만 정작 사랑을 실천해야 할 대상은 등한이 여기는 것이지요. 교회 일로 너무 바빠서 그렇다고 핑계를 댑니다. 그러고 보면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께 열심을 내는 것 하나로 모든 부분에서 면죄부를 받으려고 합니다. 지나치게 비싼 교회집기를 사들여도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기 위한 것이라면 허용이 됩니다.  화려한 건물, 화려한 조명, 화려한 음악, 화려한 무대 등등 인간들이 보기에도 지나칠 정도로 사치스러운 것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면 반대조차 못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얼마나 많은 ‘고르반’들을 남발하며 그것으로 정작 하나님 자녀의 의무를 면하려 했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사건의 결말: 사람의 속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 (7:13~15)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위선을 거침없는 말로 질타를 하시던 예수님은 이제 모든 무리들을 향해 이야기를 하십니다. 여기서 모든 무리들이란 물론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그리고 제자들을 포함한 그곳에 모인 모든 사람을 의미합니다. 7장 13절~16절을 읽으십시오.

13 너희의 전한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또 이같은 일을 많이 행하느니라 하시고 14 무리를 다시 불러 이르시되 너희는 다 내 말을 듣고 깨달으라  15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16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하시고” (막 7:13-16).

13절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신봉하는 유대주의를 예수님이 한마디로 총정리를 해주신 구절입니다. “너희의 전한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라는 말은 인간들의 가르침이 아무리 좋아도 하나님의 말씀과 정면으로 위배가 될 경우가 많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인간들이 자신의 생각으로는 하나님을 잘 섬기고 반드시 그렇게 해야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생각을 하여 최선을 다해 신앙생활을 하는데 그것이 오히려 진리를 왜곡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사람들을 멀게 한다는 의미가 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날 외적인 것들만 강조하는 우리 기독교에도 그대로 해당되지는 않는지 심각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신앙의 내실을 기하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 사랑을 조용히 오른손이 하는 일은 왼손이 모르게 실천하는 것보다는 외부로 더들썩하게 대 놓고 하나님의 뜻을 부르짖으며 인간의 욕심을 채우는 일은 없는지…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는 말씀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예수님은 모든 무리들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말이지요. [그 의미에 대해서는 다음에 이어서 계속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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