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생각
April 8, 2015 | by B2B Missions
[성경올바로이해하기시리즈1] 행위의 결과인가? 의도인가? (막7:1~23) (마가복음 19)-세번째

율법의 정신: 행위보다 마음이다 (7:17~23)

자신의 주위에 모인 모든 무리들에게 율법의 진정한 정신을 가르치시고 유대인들의 밖으로 보여주기식의 신앙에 대해 일갈을 하신 예수님은 다시 식사를 나누던 곳으로 들어가십니다. 그러는 사이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말도 없이 그 장소를 떠난 것 같습니다. 이제 그 자리에는 예수님과 제자들만 남아 있었습니다.

여기서 잠깐, 복음서를 잘 이해하는 포인트 하나를 알려 드릴까 합니다. 대개의 경우 예수님은 한자리에서 여러가지 가르침을 하시는데 그 가르침의 대상이 서로 다른 경우가 많습니다. 즉, 각 가르침을 하실 때 대상을 특정하시고 그 대상을 향하여 해당되는 말씀을 선포하신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성경을 읽는 독자들도 그 대상들이 누구인지 그들이 당시에 갖고 있던 세계관이 어떠했는지를 생각하고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예수님이 왜 그런 선포를 그 자리에서 하셨는지를 알게 됩니다.

예를들어, 누가복음 15장~17장10절은 정황 상 한 장소에서 예수님이 가르치신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런데 각 메시지 마다 가르치는 대상이 다르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예수님 앞에서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은 모든 세리, 죄인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향해 긴 설교를 하십니다. 그런데 각각 말을 듣는 대상이 다릅니다. 첫번째 잃어버린 자의 비유는 듣는 대상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입니다 (눅15:2~3). 청지기의 비유는 제자들에게 (눅16:1~13), 율법에 대한 설명은 바리새인들에게 (눅 16:14~18), 거지 나사로와 부자이야기도 바리새인들에게 (눅16:19~31),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 갖추어야 할 덕목은 제자들에게 (눅 17:1~10) 한 이야기입니다. 이같은 내용을 참고로 하여 오늘 마가복음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보기로 하지요.

17절을 읽으십시오. 제자들이 예수님이 마지막 선포하신 비유에 대해 다시 물어 보았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에게 물어 보았다는 것은 그들도 예수님이 하신 말씀의 의미를 전혀 알지 못했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비교적 구체적으로 설명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요지는 이런 것이었습니다.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형식주의, 인간들이 하나님을 위한다고 하면서 그것으로 율법이 가르치고 있는 정신은 외면할 뿐 아니라 자신들이 마땅히 행해야 할 모든 것들을 면제받았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이 하신 말씀의 의미를 제자들 중 어느 누구도 깨닫지 못했다는 말이지요. 이쯤되면, 예수님도 참으로 답답할 노릇이 아닐 수 없습니다.

18절~19절에는 예수님의 수사적 질문이 나옵니다. 사실 이 질문은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답답한 마음이 실려 있는 듯합니다.  하지만, 사실은 이런 설정이 이루어진 것도 우연이라기 보다는 제자훈련에 그 목적이 있었던 것이지요. 다시말해, 예수님은 그를 따르는 사람들을 향해 무언가 교훈을 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예수님니 제자들을 향해 질문하십니다.

“너희도 이렇게 깨달음이 없느냐? 무엇이든지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며 그것들은 마음으로 들어가지 않고 배로 들어가 배설이 되기 때문에 모든 음식은 깨끗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느냐? (막7:18~19).

위에서 한글 성경과 조금 다르게 번역한 이유는 헬라어 원어에는 19절끝에 물음표가 붙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내용을 설명하시기 보다는 질문을 통해 제자들의 생각을 이끌어 내려 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의 발단이 몇몇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빵을 먹은데에서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발단이 된 사건을 상기키시면서 손을 씻고 먹으나 그냥  먹으나 그 음식이 사람을 더럽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하십니다. 인간들의 외적인 것은 그들의 마음과는 전혀 무관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외적인 것에만 매달리면, 그렇게 함으로써 오히려 마음이 더 더러워 질 수 있다는 경고도 담겨 있습니다.  인간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의로운지 얼마나 정결한지를 밖으로 보이는 것으로 평가받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요즈음 같은 자기 홍보시대에는 더더욱 그렇지요. 이러한 현상들은 정치인들이나 종교인들이나 아니면 일반인들이나 모두에게 보편적인 현상이지요.

제자들은 예수님이 가르치시고자 한 간단한 진리를 잘 몰랐던 것 같습니다. 이는 그들이 무식해서 깨닫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모든 삶과 생각 하나하나는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유대주의적 세계관에 의해 지배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외부 몸을 깨끗하게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뿌리깊은 사상은 말 한마디에 의해 쉽게 바뀔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지요. 예수님의 선언 즉,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라는 말씀은 당시 상황에서는 가히 혁명적인 발언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겉으로 깨끗하게 해야 하고 의도야 어찌되었든 행위는 옳아야 하고 그렇게 해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없는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선한가?

우리 말에는 양심(良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진 마음’이라는 뜻이지요. 사실 우리나라 조선 오백년을 지배한 사상은 기본적으로 성선설입니다. ‘인간들의 마음은 선하다’라는 것이지요. 인간들의 마음이 선하고 어질기 때문에  그 ‘어진 마음’이 우리의 삶의 기준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흔히 이런 말을 합니다. “넌 양심도 없니?” “양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하면 안되지.” 등등. 인간들을 평가하는 것으로 선한 마음을 기준으로 합니다. 여기서 맹자의 사단(四端)이야기를 간단하게 언급하고 지나가겠습니다. 맹자는 ‘인간은 원래 선하다’라는 성선설을 주장한 사람입니다. 그런 선한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네가지의 도덕적 가치가 있는데 그것을 ‘사단’이라고 합니다. 즉, 인간에게는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측은지심, 惻隱之心),  ‘자신의 옳지 못함을 부끄러워하고 남의 옳지 못함을 싫어하는 마음’ (수오지심, 羞惡之心), ‘겸손하여 남에게 양보하는 마음’ (사양지심, 辭讓之心), 그리고 마지막으로 ‘잘잘못을 분별하여 가리는 마음’ (시비지심, 是非之心) 등 네 가지의 선한 마음이 있어 이거시 외부로 발현된다고 믿고 가르쳤습니다. 문제는 이것이 기본적으로 성악설에 기초한 성경의 가르침과는 잘 맞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한국인들이 구원을 이해하는 것이 처음부터 맹자의 사상에 기초한 성선설을 세계관으로 하고 있는 우리 민족에게는 잘 맞지 않았던 것이지요.

성경 로마서 2장에는 양심이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하지만 그 양심이라는 단어는 우리말로 번역되면서 중립적인 단어가 긍정적인 단어로 바뀐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 2장 14절과 15절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가지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롬 2:14~15).

여기서 ‘양심’으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수네이데시스’ (συνείδησις) 입니다. 이 단어는 직역하면 ‘함께 알다’ ‘함께 판단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인간의 내면에 선과 악을 판단하는 기준이 있다는 말입니다. 즉, 선과 악을 판단하는 기준이 각자의 마음 가운데 심겨져 있어 그것으로 세상의 이치를 판단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수네이데시스는 좋은 의미를 표현하는 것도 나쁜 의미를 표현하는 것도 아닌 ‘가치중립적’ 표현입니다. 우리 ‘양심’이라는 단어와 다른 것은 ‘양심’은 가치중립적인 것이 아니라 그 단어 자체로 이미 ‘어진 마음’이라는 선함을 추구하는 단어이지요. 이 ‘수네이데시스’는 인간의 선악판단기준을 의미합니다. 아담이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은 후 하나님이 하셔야 할 선과 악을 판단하게 하고, 이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이나 인간의 행위들을 좋은 것과 나쁜 것, 선한 것과 악한 것, 옳은 것과 그른 것으로 구분하기 시작했고 구분하는 기준을 말하는 것이지요.  즉, 인간의 주관적 선악판단기준을 말하는 것이지 그 기준이 옳다거나 선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한국인들은 알게 모르게 이런 성선설에 입각한 세계관으로 성경을 판단하고 세상의 이치를 판단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의 가르침은 우리 한국인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정반대의 입장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 예레미야서는 인간의 마음에 대해 이렇게 규정합니다.

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10 나 여호와는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 행위와 그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렘 17:9-10).

인간의 마음은 만물 중 그 어떤 것 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했다고 선언하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그 마음을 살피사 사람들을 판단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외부로 드러나는 행위가 아무리 옳고 잘된 것이라 할지라도 그 의도가 자신이 칭찬을 받기 위한것이라면, 자신이 속한 조직, 사회를 유리하게 하여 자신이 좀 더 돋보이고자 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라 생각한다는 것이지요. 에를들어 기독교 단체에서 불우이웃을 돕는 일을 하는데 그것을 통해 좀더 이미지를 개선하여 교세를 확장하려고 한다거나 돕는 사람들이 스스로가 심리적으로 위안을 얻으려고 한다면 그것은 순수성을 훼손할 수 있다는 말이됩니다.  다른 말로 결국 인간은 100% 순수한 동기를 가질 수 없다는 말도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생각이나 계획이 아닌 성령님의 인도를 받라야 하는 것이지요.

마음의 의도를 살피라

마가복음으로 돌아가 예수님의 말씀을 더 들어보기로 하지요. 마가복음 7장 20절~23절입니다.

20 또 가라사대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21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22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 23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막7:20-23).

예수님은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들’이고 그 악한 생각들이 속(마음)으로부터 나와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은 듣는 사람들에 따라서 매우 불편할 수 있습니다. 또 정면으로 반박하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이 말씀에서 우리는 타협의 여지조차 주지 않고 매우 단호하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은 왜 이렇게 강하게 인간들의 마음에 대해 부정적인 표현을 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두가지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째, 당시 유대주의라는 사회문화적 환경에서 외식하는 유대주의자들을 향한 강한 비판일 수 있습니다. 속 마음이야 어쨋든 겉으로 드러나는 부분만 깨끗하고 의롭게 여기면 된다는 그들의 그릇된 세계관을 폭로하시는 것이지요. 둘째, 인간들은 일반적으로 누구나 그렇게 겉과 속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유대인 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들이 그렇다는 것이지요. 많고 적음, 크고 작음은 있을지 모르지만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그런 마음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좀더 내세우고 싶고, 자신을 돋보이는 일이라면 마음에 썩 내키지 않아도 하는 것 말이지요.

예수님은 이러한 행위나 상태의 결과보다는 의도를 중시여긴다는 말씀을 산상수훈에서도 밝히셨습니다. 마태복음 5장 21절~22절,  27절~28절까지를 보겠습니다.

21 옛 사람에게 말한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27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8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 (마 5:21-22, 27-28).

예수님의 이 기준은 한눈에 보아도 모세 율법보다 훨씬 더 엄격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행위 이전에 행위가 있게 한 마음을 보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으면 율법으로부터 해방되었고, 그래서 아무런 죄를 지어도 다 용서가 된다는 용서와 은혜의 복음에 익숙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스스로에게 “우리의 예수님에 대한 그 믿음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 율법의 정신을 자체를 바꿀 수 있는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저 보아야 합니다. 그럴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 세상의 누구도 예수님의 깅력한 율법의 정신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요? 예수님이 강조하신 그 율법의 정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요? 인간의 노력으로 그것으로부터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요?

그래서 인간의 구원은 매우 역설적인 것입니다. 인간이 스스로 그것을 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하시고 하나님의 영을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 안에 거하시면서 우리가 애써 이루려고 하는 율법적 노력을 포기토록 하고 성령님이 우리를 인도하여 이루도록 하시는 것이지요.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12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롬 8:12-14).

여기서 “영으로써 육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라고 이야기 했는데 ‘영’은 우리가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도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입니다. 하나님의 영에 의해 육의 행실이 죽는 것이지요.  즉, 성령에 의해 내가 이끌리는 삶을 살아갈 때 비로소 우리의 육신적인 요소들이 하나 둘 제거되고  궁극적으로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율법의 정신이 나의 삶을 통해 구현될 수 있을 것입니다. 성령님에 의해 인도되는 삶이 평탄한 길이 아니라 할지라도 기꺼이 그 길로 발걸음을 옮길 수 있는 것입니다[B2B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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