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병이어
March 30, 2015 | by B2B Missions
[성경올바로이해하기시리즈1] 왜 저들을 우리가 먹여야 하나요? (막6:30~44) (마가복음 18)
[오늘부터 두 번에 걸처 소위 오병이어의 기적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대해 공부를 하고자 합니다. 오늘은 그 첫번째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읽는 관점

오병이어의 기적은 복음서 네 권에 모두 수록된 몇 안되는 에피소드 중 하나입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으로는 유일하게 기록된 것임). 네 저자가 모두 이것을 기록했다는 것은 예수님이 행하신 이 기적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이라고 명명된 이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할지라도 이 이야기는 너무도 유명해서 ‘오병이어’라는 말이 사자성어로 쓰일 정도입니다. 하지만 정작 예수님이 일으키신 이 엄청난 기적의 내용은 알면서도 정작 그 기적을 일으키신 목적이나 그 의미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입니다. 안타깝게도 믿는 사람들조차 이 사건을 잘못이해하고 있는 분들이 많습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성경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기반으로 하지 않는 적용은 하나님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자신만의 신앙일 뿐입니다. 일종의 우상숭배인 셈이지요. 따라서 말씀의 진의를 바르게 아는 것은 올바르고 건전한 신앙생활을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일입니다. 자, 그렇다면 예수님은 이 기적을 통해 제자들과 초대 교인들, 그리고 우리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려고 하신 걸까요? 지금부터 오병이어의 기적을 모티브로 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상세하게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사복음서에 기록된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나게 된 각각의 배경설명을 먼저 보기로 하지요.

13 예수께서 들으시고 배를 타고 떠나사 따로 빈들에 가시니 무리가 듣고 여러 고을로부터 걸어서 좇아간지라  1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인을 고쳐 주시니라15 저녁이 되매 제자들이 나아와 가로되 이곳은 빈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먹게 하소서” (마14:13-15).

“사도들이 예수께 모여 자기들의 행한 것과 가르친 것을 낱낱이 고하니  31 이르시되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와서 잠간 쉬어라 하시니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  32 이에 배를 타고 따로 한적한 곳에 갈쌔  33 그 가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이 저희인줄 안지라 모든 고을로부터 도보로 그 곳에 달려와 저희보다 먼저 갔더라 3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35 때가 저물어가매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여짜오되 이곳은 빈 들이요 때도 저물어가니  36 무리를 보내어 두루 촌과 마을로 가서 무엇을 사 먹게 하옵소서” (막 6:30-36).

10 사도들이 돌아와 자기들의 모든 행한 것을 예수께 고한대 데리시고 따로 벳새다라는 고을로 떠나 가셨으나  11 무리가 알고 따라왔거늘 예수께서 저희를 영접하사 하나님 나라의 일을 이야기하시며 병 고칠 자들은 고치시더라  12 날이 저물어가매 열 두 사도가 나아와 여짜오되 무리를 보내어 두루 마을과 촌으로 가서 유하며 먹을 것을 얻게 하소서 우리 있는 여기가 빈 들이니이다” (눅 9:10-12).

“그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 바다 곧 디베랴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매  2 큰 무리가 따르니 이는 병인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봄이러라  3 예수께서 산에 오르사 제자들과 함께 거기 앉으시니  4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요6:1-4)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께 나오게 이유가 제자들의 전도 활동 때문이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반면 마태복음은 요한복음과 마찬가지로 무리들이 예수님의 기적을 본 것이 가장 큰 동기로 작용했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각 복음서의 기록을 비교하여 유사점과 차이점을 설명하는 이유는 복음서의 저자들이 저마다의 방법으로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기적들을 통해 자신들만의 고유한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각각의 복음서는 고유의 주제를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각 복음서가 취하고 있는 관점, 의도들을 알고 기록된 사건을 해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 공부하고 있는 마가복음은 어떤 의도로 이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지를 찾아보기로 하지요. 그 의도를 찾기 위해서 일단 이 에피소드를 포함하여 앞뒤 이야기까지 범위를 넓혀서 일을 필요가 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이 포함된 연속되는 사건들은 이전에 나온  4장 1절~5장43절까지의 내용과 매우 흡사한 구조를 보이고 있습니다. 보는 이에 따라서는 마치 데칼코마니를 보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4:1~2: 수많은 사람들이 모였고 예수님이 가르치심/6:30~34: 수많은 사람들이 모였고 예수님이 가르치심

4:3~34: 천국의 비유/6:35~44: 오병이어의 기적

4: 35~41: 풍랑을 잠잠케 하심/6:45~52: 풍랑을 잠잠케 하심

5:1~43: 귀신을 쫒아내님, 병자를 고치심, 죽은 자를 살리심/6:53~56: 병자를 고치심 (옷가에 손을 대는 자는 다 성함을 얻음)

위의 비교된 내용을 보면 무대의 세팅이나 전체적인 구성이 서로 매우 흡사함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4장에서 예수님이 비유로 ‘천국’을 설명하셨다면 6장에서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여 주셨다는 점이지 다른 점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재미있는 결론을 도출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마가가 서로 다른 사건들을 이용하여 일관된 메시지를 반복해서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는 시각은 어떠해야 할까요? 하나님의 나라의 모습을 보여준 것이 아닐까요? 실제로 내용을 살펴 보면서 이 가정의 진위여부를 알아보기로 하겠습니다.

전통적으로 이해하는 오병이어의 기적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예수님께 가져가면 그것이 뻥튀기가 되어 모든 사람을 먹일 수 있다는 기적 그 자체에 촛점을 맞추거나 도시락을 가져와 모든 것을 내어드린 어린아이의 믿음 중심을 두기도 합니다.  요한복음과 같이 빌립과 안드레의 역할이 구체적으로 거명이 된 경우에는 빌립의 현실주의를 비판하고 안드레의 순진한 믿음을 높이 사기도 하지요. 오병이어의 기적은 그와 같은 인간적인 교훈들을 얻을 수 있는 소재가 너무도 많습니다. 그렇게 해석한다고 해서 크게 무리수는 아닐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인간들에게 교훈을 주기 위한 목적을 정해 놓고 그것에 해석을 맞추는 것은 바람직한 해석방법이 되지 못함을 앞선 성경해석들을 통해 공부한 바가 있습니다. 그러한 해석기준은 오병이어의 기적에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그렇다면 이 에피소드를 읽고 어떤 질문을 던져야 옳은 답을 얻을 수 있을까요? 그것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첫째, 예수님이 왜 이런 기적을 제자들에게 보여 주었을까요? 둘째, 당시 제자들은 이 기적을 어떻게 이해하였을까요? 셋째, 이 글을 쓴 마가는 독자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이 이야기를 이런 구성하 에 넣어 소개하고 있을까요? 넷째, 당시 마가복음을 처음으로 읽은 독자들은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했을까요? 마지막으로 오늘날 성경을 읽는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까요? 지금부터 이러한 질문들을 염두에 두고 오병이어의 기적에 대한 이야기를 하나하나 설명해 나가기로 하겠습니다.

사건의 발단: 수많은 사람들이 모였는가?

앞의 질문들에 대답을 하기 전에 왜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일시에 먹을 것도 없는 빈들로 달려 나왔는가?라는 질문을 던져 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 이들이 집단적으로 생업을 포기하고 빈들로 나왔을까요? 이 사건은 지금으로부터 2000여년전에 유대땅 갈릴리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이들의 숫자는 남자만 오천명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여자와 아이들까지 포함할 경우 수만명의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운집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들이 광야로 달려 오게 된 동기를 알아내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마가복음 6장 30절~33절을 읽으십시오.

30 사도들이 예수께 모여 자기들의 행한 것과 가르친 것을 낱낱이 고하니  31 이르시되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와서 잠간 쉬어라 하시니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  32 이에 배를 타고 따로 한적한 곳에 갈쌔  33 그 가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이 저희인줄 안지라 모든 고을로부터 도보로 그 곳에 달려와 저희보다 먼저 갔더라” (막 6:30-33).

파송되었던 사도들이 돌아와 예수님께 자신들의 사역보고를 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은 예수님은 그들에게 한적한 곳에 와서 음식을 먹으며 잠간 쉬라고 권합니다. 그들이 있는 그곳에는 오가는 사람들이 많아 음식먹을 겨를도 없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그들은 배를 타고 다른 곳으로 이동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가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보았습니다. 군중들은 그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인 것을 금방 알아 보았고 제자들이 가려는 곳을 향해 도보로 달려와 제자들이 가고자 하는 곳으로 먼저 달려갔습니다.

이 내용만 놓고 보면 수 많은 사람들이 한적한 곳으로 달려오게 한 사람들은 예수님이라기 보다는 제자들이었습니다. 물론 내면을 드려다 보면 예수님 때문에 생긴 일이지만 표면적으로는 많은 사람들이 제자들인 줄 알아 보고 고을로부터 도보로 그곳에 달려와 제자들보다 먼저 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빈들로 나오게 된 동기를 밝히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을 책임져야 할 일차적인 책임이 누구에게 있느냐?’의 문제를 이야기해야 하기 때문이지요. 뒤에서 이야기를 하겠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러한 의도가 있는 질문을 하십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제자들을 보고 따라 나왔을까요?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보다 앞에 기록된 이야기를 찾아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마가복음 6장 7절~13절을 보겠습니다.

7 열 두 제자를 부르사 둘씩 둘씩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세를 주시고8 명하시되 여행을 위하여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주머니나 전대의 돈이나 아무 것도 가지지 말며  9 신만 신고 두 벌 옷도 입지 말라 하시고 10 또 가라사대 어디서든지 뉘 집에 들어가거든 그곳을 떠나기까지 거기 유하라 11 어느 곳에서든지 너희를 영접지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거기서 나갈 때에 발 아래 먼지를 떨어버려 저희에게 증거를 삼으라 하시니 12 제자들이 나가서 회개하라 전파하고 13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병인에게 기름을 발라 고치더라” (막 6:7-13).

예수님은 열두제자를 파송하였고, 열두제자는 대대적인 전도활동을 펼쳤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직접 사역하실 때와 마찬가지로 수 많은 이적들을 보여 주었습니다. 사람들은 제자들의 사역을 주목하고 있었고 그 사역을 보고 무작정 제자들을 따라 나선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마가복음 4장 1절과 매우 유사합니다. 마가복음 4장 1절에서는 예수님의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예수님 주변으로 모였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이번에는 제자들의 복음전도를 듣고 이적을 본 사람들이 몰려 들게 된 것입니다. 참고로, 요한복음은 수 많은 사람들이 몰려든 이유를 이렇게 적고 잇습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매 큰 무리가 따르니 이는 병자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보았음이러라” (요 1:1~2).

요한복음은 예수님을 보고 따라 온 것이지 제자들을 보았다는 이야기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마가복음은 이들이 모여 들게 된 일차적인 책임이 제자들에게 있음을 분명히 합니다. 이는 각 복음서를 쓰게 된 동기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요한복음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그리스도이시다!”라는 점을 입증하기 위한 일종의 변증서라면 마가복음은 두 가지 질문 즉, 첫째, 예수는 누구인가? 이고 두번째, 그렇다면 제자들(초대교회, 특히 로마교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가르치기 위한 책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마가복음을 읽으면 두가지 질문 모두에 대한 답을 주고자 하는데 저자가 역점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마가복음 4:1~5:43은 예수님의 역할이 강조되고 있고 예수님이 누구인가를 강조한 것이라면 6:1~55은 제자훈련의 목적이 강하게 부각된 메시지로 볼 수 있습니다.

사건의 전개: 광야교회와 예수님의 가르침

제자들의 전도활동이 발단이 되어 수많은 사람들이 광야로 달려 나왔습니다. 그들은 잠시 동안이지만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버리고 무작정 제자들을 보기위해(궁극적으로는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달려 나온 것이지요. 사실 제자들은 사역보고를 마친 후 한적한 곳에서 쉬면서 음식을 먹을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수 많은 무리들로 인해서 그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6장 34절을 읽으면 사건이 제자들이 의도한 바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흐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기지로 가르치시더라” (막6:34).

큰 무리가 제자를을 보고 쫒아 왔지만 결국 그들은 예수님께 인도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큰 무리를 보시고 “목자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마가는 아주 재미있는 단어로 그들의 모습을 설명합니다. “목자없는 양”들이 빈들로 나온 것입니다. 여기서 빈들이란 광야를 말합니다. 헬라어 원어는 ‘에레모스’인데 이는 사막(광야)을 의미합니다. 물하나 없는 사막으로 목자없이 방황하는 모습을 보고 예수님은 매우 마음 아파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물을 건너 사막으로 들어간 그들의 조상입니다. 이 모습은 애굽땅에서 나온 무리들이 홍해를 건너 사막으로 들어간 것과 마우 흡사한 모습을 보입니다. 출애굽기 15장 22절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광애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길을 걸었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 (출15:22).

모세를 따라 애굽을 탈출한 백성들은 이후 갖은 고생을 다하게 됩니다. 물이 없어 마라의 쓴물을 마시게 됩니다. 엘림 오아시스에서의 휴식도 잠시였습니다. 그들은 광야를 행군하여야 했고 애굽을 떠난지 한달째 되는 날 그들은 가지고 온 식량도 드디어 바닥을 드러냈습니다. 백성들은 모세와 아론을 이렇게 원망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 (출16:3).

이스라엘 백성들의 항변은 일리가 있어 보입니다. 물론 이들이 고단한 노예생활을 탄식하고 부르짖었고 그들의 그 탄식이 하나님께 들렸으며 하나님은 그들과의 언약을 기억하사 그들을 구해내신 것입니다 (출2:23~25참조). 그러나 사실 그들이 직접적으로 애굽으로부터 탈출시며달라는 부탁을 한적도 없습니다. 그들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으로 단가는 이야기를 듣고 모세를 따라 나섰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물이 없는 사막에서 목마름과 배고픔에 시달려야 했던 것이지요. 하나님은 모세와 아론을 불평하는 그들에게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 주셔서 그들이 노동을 전혀하지 않고도 배불리 먹을 수 있도록 해 주십니다.

마가가 속해 있던 로마의 초대교회는 어떠했습니까? 그들은 제자들이 전해 준 복음을 듣고 믿어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천국이 이미 임하였다고 하였는데 그들의 현실은 정반대였지요.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삶의 터전에서 쫒겨나야 했고, 극심한 핍박을 당하고 죽임을 당해야 했습니다. 수 많은 사람들이 숨어 살거나 굴혈을 파고 숨어 들어가야 했습니다. 마가복음은 그렇게 제자들의 복음 전함을 듣고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것이 목숨을 걸어야 할 정도로 심각한 상황에 있는 분들을 대상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길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보기로 하지요. 제자들의 전도로 인해  갈릴리 사람들은 자신들이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광야에 공동체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측은하게 생각하셨고, 그들을 여러가지로 가르치기 시작하셨습니다.

위기 [1]: 광야 교회에 찾아 위기

예수님이 말씀을 듣는 동안 저녁무렵이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장소가 광야입니다. 그리고 시간이 매우 늦었습니다. 그들을 내보내십시오.  그들이 이 주변의 촌이나 마을로 들어가 그들 스스로 무엇이든 사서 먹도록 하십시오.”  제자들의 이 말에서 우리는 제자들이 처한 세가지 위기를 발견하게 됩니다.

첫번째 위기는 장소의 위기입니다. 그들이 있는 곳은 그들이 살던 곳이 아닙니다. 식량도 물도 구할 수 없는 광야입니다. 그들은 안전하고 익숙한 자신들의 공동체를 떠나서 제자들을 쫒아 낯선 곳으로 왔습니다. 사실, 마가가 처한 공동체가 그랬습니다. 베드로는 50년대 초중반 그가 개척했고 그토록 사랑했고, 자신을 기둥같이 여기던 예루살렘교회를 떠나 지금의 터키 북부지방을 지나 나중에는 로마에 들어갑니다. 로마에는 유대인 디아스포라들이 많았고, 최초로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들인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발적으로 또는 비자발적으로 고향을 등진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자신들이 살던 정든 곳을 등져야 했던 사람들도 많았지요. 그런 그들이 네로황제의 무자비한 핍박이 일어나는 중심부에 들어와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로마가 광야였던 것입니다.

두번째 위기는 시간의 위기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동안 시간이 흘렀고 이미 저녁이 다 되었습니다. 날은 어두워지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어두움은 단순히 시간상 저녁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어두움은 곧 이 세상의 지배세력 즉, 사탄이 지배하는 시간대입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이후에도 교회는 여전히 빛에 속하였지만 세상은 그렇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대제사장들이 보낸 사람들에 의해 겟세마네 동산에서 잡히실 때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52 예수께서 그 잡으러 온 대제사장들과 성전의 군관들과 장로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왔느냐  53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을 때에 내게 손을 대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두움의 권세로다 하시더라”  (눅 22:52-53).

실제로 복음서의 기록을 보면 제자들이 위기상황을 맞이 한 것은 늘 밤이었습니다. 물론 예수님도 밤에 잡히셔서 밤새도록 수난을 당하셨습니다. 이와같이 저녁무렵이 되었다는 것은 광야 공동체가 아주 힘든 상황으로 접어들거나 이미 힘든 상황에 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세번째 위기는 먹을 것의 위기입니다. 장소도 그렇고 시간도 그렇지만 그들을 더 힘들게 한 것은 먹을 것이 전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일시에 생긴 광야공동체의 해체를 선언합니다. “그들을 내 보내십시오.” 여기서 ‘내보내다’로 번역된 헬라어 ‘아포루손’ (ἀπόλυσον)은 ‘풀어주다’라는 의미의 헬라어 동사 아포루오(ἀπολύω)의 명령형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 이제 사람들을 그만 붙잡아 두지 말고 그들을 풀어주시지요”라는 의미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 때문에 이들이 늦은 시간까지 남아 있고 집으로 돌아갈 시간인데도 돌아가지 않고 있으니 이제는 그들을 자유롭게 놓아 주어 그들 스스로 살아가게 하라는 말입니다. 36절의 이 명령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이는 책임성에 관한 문제입니다. 물론 상황은 이 세상의 먹을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보면 영의 양식 즉, 생명의 양식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지요. 이 세상의 썩을 양식이 아닌 생명의 양식이라면 누가 이들에게 그 양식을 주어야 할까요? 당연히 일차적인 책임은 예수님에게 있습니다. 하지만 다음으로 책임져야 할 사람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지요.

이제 다시 로마의 핍박 하에 있는 로마교회의 상황으로 돌아가 봅시다. 그들에게 예수님을 포기하고 각기 집으로 돌아가서 스스로 알아서 살아가게 할 것인가? 아니면 교회공동체를 지킬 것인가?에 대한 기로에 서있었습니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뭉치면 죽고 흩어지면 사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서든 교회 공동체를 속하는 것 보다는 될 수 있는대로 서로 모이는 것을 피하는 것이 상책이었지요. 하지만 성도들이 결국 선택한 것은 어떻게 해서든 공동체는 지켜져야 하고 복음은 전해져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가 당시 로마의 핍박하에 있던 그리스도인들에게 편지한 내용을 보면 그들이 어떠한 태도를 취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23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아  24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히10:23-25).

위기[2]: 누가 이들을 책임져야 것인가?

예수님께 이 모든 사람을 이제 그만 놓아 주어 각자 알아서 살아가도록 하자는 제자들의 제안에 대해 예수님이 대답하십니다. “너희들이 먹도록 주어라!” 예수님은 이들을 돌려 보내는 것 보다는 그대로 있던 자리에 있게 하고 제자들에게 그들을 먹일 것을 명령하십니다. 그러자 제자들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우리가 떠나 이백데나리온의 빵을 사서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야 합니까?” 이 표현은 헬라어 원어를 그대로 직역한 것입니다. 여기에는 우리 한국어 문법에는 없는 헬라어 고유의 문법이 들어 있습니다. 한국어 문법에 없다는 말은 한국어로 표현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말입니다. 직역을 하면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어쨋든 헬라어 동사표현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의미가 크게 달라진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제자들의 대답을 해석해야 합니다. 여기에 쓰인 동사를 보는 관점은 영어로는 ‘서브정티브’(subjunctive)라고 하는데 이는 하나의 관점이 아니고 여러가지 관점으로 해석이 가능할 때 주로 사용됩니다. 제자들이 “우리가 이백데나리온의 빵을 사서 (ἀγοράσωμεν),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야 합니까?”라고 표현한 것 중 ‘사다’라는 표현이 이에 해당합니다. 이 이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로 해석이 가능합니다. 첫째, ‘우리가 어떻게 이백데나리온의 빵을 살 수 있느냐?’라는 방법과 능력에 관한 질문입니다. 이 질문은 능력과 방법만 되면 자신들이 사서 먹이겠다는 의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해석합니다. “너무 많은 돈이 들어가고 지금 그 많은 빵을 구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습니다.”라는 의미로 제자들이 말을 했다는 것이지요. 일리가 있는 해석입니다. 두번째 해석은, “우리가 왜 이백데나리온이나되는 빵을 사다 저 사람들에게 주어야 합니까?”라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설령 이백데나리온의 돈이 있고 주변에 빵도 충분히 있어 살 수 있다해도 그것을 왜 제자들이 해야 하느냐?라는 질문이지요. 첫번째 질문은 현실성에 대한 질문이라면 두번째 질문은 당위에 대한 질문입니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어떤 해석방법이 옳다고 보나요? 첫번째 즉,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라는 의미를 따르면 제자들은 하고 싶어도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많은 경우 제자들의 믿음없음을 질책합니다. 예수님을 못믿는다는 것이지요. 두번째는 제자들의 의무에 대한 문제입니다. 믿음의 문제가 아니고 역할의 문제일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두번째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 생각을 합니다. 그 질문이 마가복음을 쓸 당시 제자들의 질문이었으니까요. 제자들에게 땅끝까지 이르러 증인이되라는 말씀을 남긴 채 하늘로 올라 가신 예수님은 오시지 않고 제자들을 비롯한 교회공동체는 네로황제의 계속되는 기독교말살정책에 따라 괴멸될 위기에 처했습니다. 한 세대가 가기 전에 오신다는 예수님을 간절히 기다리며 수많은 사람들이 믿음 하나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들을 이제 내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들도 살아야 할 것 아닙니까? 우리가 왜 그들을 붙들고 있어야 하고 왜 우리가 먹여 살려야 합니까? 그들이 헤어져 떠나는 것이 그들에게도 좋은 것이 아닐까요?” 재자들은 이런 질문을 던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이 현실이니까요.

우리는 여기서 제자들의 믿음없음을 탓해서는 안됩니다. 현실만 바라보는 그들을 비난할 수도 없지요. 우리들은 지금 그런 상황을 역사책에서 읽어 배웠을뿐이고 영화나 드라마로 간접 체험을 했을 뿐입니다. 곧 오신다는 약속을 하고 떠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며 그가 유일한 구원자요 유일한 주님임을 고백하는 것에 자신들의 목숨을 걸고 있습니다. 더더군다나 그들은 예수님을 보지도 못했고 예수님으로부터 직접적으로 복음을 전해 들은 것도 아닙니다. 그들은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 그리고 승천하심도 제자들이 전한 복음을 듣고 믿었을 뿐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항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 우리가 이들에게 무슨 말로 위로를 해야할까요? 어떻게 이 공동체를 이끌고 가야지요? 그리고 왜 우리가 이것을 해야만 합니까? 마라나타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다음 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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