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병이어-2
March 31, 2015 | by B2B Missions
[성경올바로이해하기시리즈1] 왜 저들을 우리가 먹여야 하나요? (막6:30~44) (마가복음 18-2)

어제에 이어 두번째 글입니다. 너무 길어 둘로 나누었습니다.어제 글에 이어서 읽으시면 도움이 됩니다.

절정: 예수님의 개입과 하나님의 나라

“우리가 왜 그 많은 빵을 사서 그들에게 주어야 하느냐?”고 항변하는 제자들의 이야기를 들은 예수님이 문제에 개입하시기 시작합니다. “얼마나 많은 빵을 너희가 가지고 있느냐? 너희는 가라 그리고 보아라!” 예수님은 제자들의 질문에 대답을 하는 대신 문제에 직접적으로 개입을 하십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무책임함에 대해 나무라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들에게 “그것이 너희의 의무가 아니냐?”라고 짐을 지우지도 않았지요.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먼저 질문을 던지십니다. “너희가 얼마나 많은 빵을 가지고 있느냐?” 이 질문은 교회 공동체가 처한 현실을 예수님이 몰라서 하시는 질문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미 이 공동체가 스스로 먹을 것을 만들어 공동체를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이 전혀 없음을 알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이런 질문을 하셨을까요? 일부라도 인간이 기여를 해야 그것으로 예수님이 이적을 행할 수 있다는 것인가요? 다른 말로 인간들이 성의표시를 해야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계시는 것인가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이 말씀은 자신이 가진 것을 내 놓으라는 말도 아니지요. 오히려 제자들에게 현실을 직시하고 그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인식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초월적인 능력이 아니고는 이 현실을 타개할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다는 것을 가르쳐주시기 위함이지요.

예수님은 두개의 명령어를 사용하십니다. “떠나가라” 그리고 “보아라”입니다. 예수님 앞에서 이 일을 어떻게 할 것인가? 그들을 잡아두지 말고 내보내라고 매달릴 것이 아니라 일단 예수님 곁을 떠나 눈으로 확인하라는 것이었지요.

제자들은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가서 확인을 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리고는 “다섯과 물고기 두마리입니다”라고 보고를 합니다. 저자인 마가는 빵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누구의 것인지에 대해 관심이 없습니다. 그냥 제자들이 찾아낸 것의 전부를 말할 뿐입니다. 예를들어 요한복음은 안드레가 한 어린아이가 가지고 온 도시락을 언급하고 있지만 마태, 누가, 마가는 누구의 것인지를 서술하고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성급하게 요한복음을 인용하여 한 어린아이가 가지고 온 것으로 속단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마가복음을 최초로 읽은 사람들은 요한복음을 읽지 않았을 수가 있기 때문이지요. 사실 이 빵다섯과 물고기 두마리의 출처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만약 출처가 중요했다면 마가는 그것을 적시했을테니까요. 빵 다섯덩어리와 물고기 두마리를 찾았을때 제자들의 심정을 어땠을까요? 너무 기뻐서 뛰었을까요? 그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 아마 좌절했을 것입니다. 도대체 이것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하지만 예수님의 명령이니 그들은 그것을 들고 예수님 앞으로 나왔습니다.

제자들로부터 빵 다섯과 물고기 두마리를 건내 받은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명령을 합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을 그룹을 지어 푸른 풀밭위에 눞게 하였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오십명씩 백명씩 그룹을 지어 누었습니다. 이 장면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그룹을 지어 누운 곳이 푸른 풀밭이라는 점입니다. 마가는 푸른 풀밭(푸른 초장)을 강조하면서 앞선 표현 광야(사막), 빈들이라는 장소를 대조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분명 같은 장소에 있습니다. 하지만 마가의 시각은 빈들이요 사막에서 푸른 풀밭으로 그 표현이 바뀌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굳이 시편 23편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온전한 하나님의 나라의 회복, 하나님의 나라 공동체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이들이 처한 현실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그들이 변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들은 있던 그자리에 오십명씩 백명씩 모였을 뿐입니다. 그런데 마가는 앞서 절망적인 환경과는 전혀 다르게 환경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오십명씩 백명씩 그룹을 지어 모였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들이 모여 앉은 그 모습 속에서 어떤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교회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위험하고, 목숨을 내 놓아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고 가정집에 모여서 떡을 떼고 교제를 나누며 예배를 드리는  모습이 생각났습니다. 비록 화려한 성전이 아닌 후미진  뒷골목에 위치한 모임장소라 할지라도, 고급차를 몰고 뽐내며 찾아오는 교회가 아닌 감시자들의 눈을 피해 숨죽이며 모여든 곳이지만 그들에게는 그곳이 천국이 아니었을까요?

40절과 41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과 함께 하는 천국경험은 절정에 달합니다. 예수님은 빵 다섯개와 물고기 두마리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하늘을 우러러 축사를 하셨습니다. 여기서 축사를 하셨다는 말은 축복의 말을 했다는 의미입니다 (유로게오(εὐλογέω)). 공관복음(마태, 마가, 누가)는 모두 이 단어를 사용하였습니다. 이는 그야 말로 축복의 말을 하는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하늘을 우러러 감사했다고 이해하는데 ‘감사하다’라는 말과는 전혀 다른 의미입니다. 예수님이 하늘을 우러러 보셨지만 말씀은 축복의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 참고로 요한복음은 ‘유로게오’라는 동사 대신에 ‘감사하다’라는 의미의 동사 ‘유카리스테오 (εὐχαριστέω)를 쓰고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하늘을 우러러 감사 표시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축복의 말을 한 후 빵과 물고기를 쪼개어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빵과 물고기를 사람들 앞에 두었습니다. 41절의 마지막은 “모두 나누었습니다”로 끝이 납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나누어 제자들에게 주었고 제자들은 그것을 부지런히 모든 사람에게 풍족하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39절~41절을 읽으시면서 머리속으로 풍경을 그려 보시기 바랍니다. 푸른 초장에 비스듬이 오십명, 백명씩 사람들이 때를 지어 있습니다. 제자들은 열심히 빵과 물고기를 나누어 줍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계속해서 먹을 것을 공급하고 계십니다. 이 모습은 영낙없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마가가 속했던 로마의 교회 공동체는 어떠했을까요? 그들은 여전히 사막 한가운데로 내몰린 듯한 삭막한 곳에 살고 있습니다. 날은 어두웠고 어두움의 세력들이 우는 사자처럼 교회를 삼키려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작지만 그리고 감시자들의 눈을 피해 숨어들어 모여 있지만 하나님 말씀이 그립고 예수님의 사랑이 너무도 커서 그곳을 떠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환경은 점점 불리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를 삶으로 체험했습니다. 역경 가운데에서도 하늘나라의 삶을 누리는 이들의 모습은 찬송가  ‘내 영혼이 은총입어’를 떠오르게 합니다.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짐 벗고 보니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주의 얼굴 뵙기 전에 멀리 뵈던 하늘나라 내 맘 속에 이뤄지니 날로날로 가깝도다/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후렴]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결말: 하나님 나라를 누리다

마가는 간결하지만 매우 강렬한 이미지를 주는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은 네개의 동사를 사용하여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42절~44절의 우리 한글 번역은 “다 배불리 먹고 남은 떡 조각과 물고기를 약두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떡을 먹은 남자는 오천명이었더라”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같은 번역은 한국어 문법에 맞추다 보니 원문이 지니고 있는 문학적인 표현과 그것이 주는 강한 이미지를 살리지 못했습니다. 본문을 어순 그대로 직역하면  다음과 습니다.

“먹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리고 만족되었습니다/ 모았습니다 조각들을 열두광주리를 가득하게 역시 물고기 두마리로부터/먹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오천명의 남자들이.” (막 6:42~44).

그들은 한사람도 빠짐없이 모두가 빵과 물고기를 먹었습니다. 정든 집을 떠나 광야 거친 곳으로 달려나와 예수님의 강론을 듣다가 어두움 즉, 죽음의 위기를 맞은 이들 모두가 예수님이 나누어 주시는 음식을 먹었습니다.  두번째로 그들 모두가 만족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배가 부른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만족하다’라는 의미의 헬라어 단어 ‘초르타조’ (χορτάζω)는 육체적 만족 뿐 아니라 정신적인 충촉을 나타낼때에도 사용되었습니다. 어느 시편기자는 고난 당하는 인생을 하나님이 어떻게 돌보시는 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노래했습니다.

4 저희가 광야 사막 길에서 방황하며 거할 성을 찾지 못하고  5 주리고 목마름으로 영혼이 속에서 피곤하였도다 6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건지시고  7 또 바른 길로 인도하사 거할 성에 이르게 하셨도다  8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이한 일을 인하여 그를 찬송할지로다  9 저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시 107:4-9).

9절에서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하게 하시며”에서 만족하게 하시다라는 단어를 칩십인역에서 ‘초르타조’를 사용하였습니다. 마가는 이 단어를 사용하면서 지치고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 있는 교회공동체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영혼은 늘 충만한 삶을 살고 있음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들은 여전히 굶주릴 수 있고, 여전히 사자 굴에 들어 갈 수 있으며, 여전히 수 많은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만족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이 그들의 구주라는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열두 광주리를 가득 모았습니다. 우리는 하필이면 왜 열둘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열두명의 제자들이 한 바구니싹 가득채웠음은 확실합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열두지파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교회의 완성을 의미한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 수록되어 있지 않고 증거가 희막하기 때문에 그렇게 숫자를 연결하여 해석하는 것은 위험할 수 있습니다. 억지해석 보다는 성경을 있는 그대로 읽는 것이 덜 위험할 때가 있습니다.

결론: 다시 질문으로

이제 결론을 맺을 시간이 되었습니다. 결론은 본격적인 본문해석에 앞서 던진 질문에 답하는 것으로 마무리하겠습니다. 첫째, 예수님이 왜 이런 기적을 제자들에게 보여 주었을까요? 예수님은 자신이 떠난 뒤 예수님을 따르는 공동체의 운명에 대해 너무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에 대한 믿음을 지키기 위해 당해야할 고난을 알게 되었지요. 그래서 교회공동체를 세우고 이끌어 갈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에 대한 직접적 경험을 해주어 그들을 교육하기 위한 목적이 매우 강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둘째 당시 제자들은 이 기적을 어떻게 이해했을까요?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적을 따라 다니며 보았고 그의 죽으심과 부활도 직접적으로 목격했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이 전한 복음을 듣고 그들을 따른 조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에 대한 직접적인 체험이 전혀 없었습니다. 제자들인 이러한 체험을 통해 자신들의 눈 앞에서 벌어지는 그 일들이 예수님 당시 보여준 그 일과 너무 흡사하다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왜 우리가 이백데나리온의 돈으로 그들을 먹어야 하느냐?”라는 질문에 대해 그들은 스스로 “이는 우리의 일이다!”라고 답했을 것입니다.

셋째, 이 글을 쓴 마가는 독자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이 이야기를 이런 구성 하에 넣어 소개하고 있을까요? 그리고당시 마가복음을 처음으로 읽은 독자들은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했을까요?  여러 번 언급했지만 이 들을 처음 읽는 독자들은 자신들의 처지가 먹을 것도 마실 것도 없는 광야로 내몰린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정든 집을 떠나야 했고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여야 했습니다(히11:38참조). 그런 그들에게 유일한 소망은 예수님의 다시 오심과 천국의 도래였습니다. 그들은 주님이 오시면 그들이 거처하는 그곳이 바로 천국으로 변할 것을 확신했습니다. 마가는 그들에게 소망을 가지고 현실을 인내해 나갈 것을 독려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오늘날 성경을 읽는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까요? 오늘날 많은 번영신학을 하는 분들이 예수님이 일으키신 기적에만 촛점을 맞추어 작은 것을 드리면 예수님이 더 큰 복을 내리신다고 가르칩니다. 이 말씀은 정반대의 의미입니다. 현실이 힘이 들고 어려워도 우리에게 천국에 대한 소망이 있다면,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다면 언젠가는 그분이 우리 마음가운데 있는 어두움을 사라지게 하고 영혼의 만족을 주실 것을 믿는 것입니다. 현실은 어렵고, 현실은 눈 앞이 캄캄할 수 있고, 이 세상에서는 소망이 끊어진 상태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나의 영혼은 그리스도로 인해 만족할 수 있는 것이지요. 정말로 내가 십자가에 달리셔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나에게 새생명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다면 말이지요. 당신은 정말로 주님 한분으로 만족하시나요? 그러면 오병이어의 기적에 참여하고 계신 겁니다 [B2B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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