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린 가나안 여인
April 14, 2015 | by B2B Missions
[성경올바로이해하기시리즈1] 예수님의 막말—이방인이 개라고? (막7:24~30) (마가복음 20)-두번째

자녀의 떡을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한 것인가? (본문해석)

본문을 해석하기에 앞서 본문의 구조를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일곱 절에 불과한 이 짧은 글도 저자인 마가는 발단 – 전개 – 위기 – 절정 – 결말 순으로 정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저자가 기록한 내용을 따라 어떻게 이야기가 전개되고 마무리 되는지를 살펴 보아야 합니다. 먼저 본문을 읽어 보도록 하지요. 마가복음 7장 24절에서 30절입니다.

[발단] 24 예수께서 일어나사 거기를 떠나 두로 지경으로 가서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하나 숨길 수 없더라

[전개]  25 이에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 아래 엎드리니 26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위기] 27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절정]28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결말] 29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 30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본즉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갔더라

발단: 예수님이 자신을 숨길 없었다

이야기의 발단은 예수님이 갈릴리를 떠나 두로지방으로 가셨고, 그곳에서 한 집에 들어 가셨습니다. 아무도 모르게 하려고 하였으나 숨길 수 없었습니다. 이 글을 읽으면 사람들이 당시에 예수님이 너무 유명하셔서 두로지방에까지 이미 널리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가 널리 펴졌을 것이고 그래서 예수님은 어디가나 자신을 숨길 수 없엇을 것이라 속단합니다. 그런 생각은 일리가 있어 보이지만, 조금 더 들어 가보면 시대착오적 해석임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당시는 요즈음처럼 인터넷이 발달하거나 해서 예수님의 사진이 나돈 것도 아닙니다. 어떤 분들은 제자들이 따라 다녔기 때문에 일행이 많아서 신분이 쉽게 노출될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렇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에 랍비 한 사람을 여러 명의 제자들이 따라다니는 것은 매우 보편적인 현상이었으므로 예수님 일행이라고 해서 특별하게 보일 하등의 이유도 없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요주의 인물이라 몽타주를 그려서 여기저기 붙여 놓은 것도 아니지요. 그래서 예수님이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려 했으나 숨길 수 없었다는 말은 다른 의미로 해석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 말씀의 원어를 직역하면, “그가 한 집으로 들어 갔을 때, 그는 어떤 사람도 깨닫게 되기를 원치 않았다. 그런데 알려지지 않을 수 없었다”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억지로 숨긴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문제는  여기서 “어떤 사람도 깨닫지 되기를 원치 않았다”는 말과 “그런데 알려지지 않을 수 없었다”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도대체 무엇을 깨닫지 못하도록 한 것일까요? 예수님이 두로에 오신 사실일까요? 아니면 예수님이 전하려는 복음일까요? 아니면 예수님이 자신의 신분을 노출하기 위한 것일까요? 많은 번역들은 이 질문에 대답으로 ‘예수님의 정체’ 또는 ‘그가 오신 사실’ 정도로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문맥을 살펴보면 그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오히려 이야기의 컨텍스트 내에서 찾아야 할 것 같습니다. 이야기의 핵심은 기구한 한 이방여인이 예수님이 오신 사실을 알았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은 한 여인에게 노출되었고, 그 여인이 복음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는 말이지요. 그렇다면, 이 여인은 예수님 (또는 자신의 딸을 구원해 줄 어떤 이)을 간절히 기다리고 소망했던 사람이라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절망가운데 있는데 예수님이 그곳에 우연히 찾아 오셨고 우연히 노출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이 여인을 만나기 위해 두로에 오신 것이고 그 여인 외에 누구에게도 자신을 노출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결국 그 여인이 예수님을 알아보고 예수님을 찾아 온 것이지요. 요한복음은 이같은 일에 대해 이렇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나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요6:44상, 참고, 요 6:65).

예수님을 알아보고 예수님을 만나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예수님은 그 역사를 이루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두로를 방문한 이유도 간단합니다. 휴가차 그곳에 들렀다가 이 여인을 만난 것이 아니라 준비된 사역이었던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이는 다음 절을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전개: 누구를 위한 소문인가?

더러운 귀신들린 어린 딸을 둔 여인이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와서 발아래 엎드렸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여인은 헬라인이고 수로보니게 족속이었는데 그녀가 예수님의 발 아래 엎드린 이유는 자신의 딸에게서 귀신을 쫒아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24절과 25절이 동떨어진 절로 읽힙니다. 그런데 원어를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24절부터 26절까지는 한 문장입니다. 25절은 24절의 내용을 설명하는 것이고, 26절은 25절에 나온 여인이 누구인지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정체가 숨겨질 수 없었던 이유를 25절에서 설명하고 있는 것이지요.

25절을 헬라어 문법 그대로 직역을 하면, “그러나, 한 여인이 그에 대하여 들었기 때문에—그   여인의 어린 딸은 더러운 영을 가졌다—그녀가 들어와서, 그의 발을 향하여 엎드렸다” 입니다. 예수님의 정체가 드러난 것은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한 여인이 있었기 때문에 그녀에게는 할 수 없이 알려질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지요. 결국 그 여인은 간절히 바라던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더러운 영’(πνεῦμα ἀκάθαρτον (프네우마 아카다르톤)이 들렸다는 말은 어떤 의미일까요? 우리 성경에는 ‘더러운 귀신’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이는 한국적 의미, 즉 전설의 고향에 나오는 그런 귀신일까요? 성경학자들은 그러한 견해에 반대의 의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히려 종교적으로보아 하나님 앞에서 깨끗하지 못한 상태를 말한다는 것이지요.  예를들어 잘못된 종교적 신념이나 이단적인 생각으로 가득 차 주위사람들에게 악영향을 주고 자신들이 말하는 것이 얼마나 남들을 힘들게 하는지를 모르는 이단종교같은 것도 ‘더러운 영’에 속한 것입니다. 그들은 늘 두려움에 쌓여 있으며,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에 심하게 대적을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따라서 마가가 말하고자 하는  ‘더러운 영’은 헬라문화 전체에 팽배한 더러운 종교적 전통이나 의식들을 포괄적으로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한 여인, 헬라, 스로보니게 등은 종교으로 비진리에 매몰되어 있는 전체 이방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의미로보는 것도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당시에는 헬라인라는 표현도 많이 쓰였지만 헬라인을 통칭 이방인이라고도 했습니다. 스로보니게 족속에 대해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원래는 북아프리카 출신들로 헬라지역에 와서 살던 사람들로 이해되고 이습니다.

위기: 자녀와

여기서 참으로 당혹스러운 표현이 등장합니다. 대체적으로 성경말씀을 읽을 때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말이나 사건이 등장하여 전체 분위기를 갈등구조로 바꾸어 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27절이 그렇습니다. 지금 이 말씀은 평소 예수님 답지 않습니다. 그냥 외교적 수사를 사용하여 애둘러 좋은 표현으로 이 여인을 돌려 보낼 수도 있는데 예수님의 말씀은 작정하고 이 가련한 여인의 가슴에 대못질을 해대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자녀로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당하지 아니하니라” (27절).

도대체 예수님은 왜 이렇게 매우 부정적이고 험한 표현을 쓰셨을까요? 당시 유대사회에서 ‘개’는 유대 주변 족속들을 표현하는 말로 돼지와 함께 ‘더러운 동물’의 대명사였다고 합니다. 성경에서 개는 항상 이스라엘에 적대적 개념이고 그것이 인간들에게 쓰였을 때에는 매우 혐오스럽고 경계해야 할 존재임을 나타냈습니다 (삼하 16:9, 시22:16, 빌3:2참조). 중요한 것은 이런 혐오스럽고, 더럽고, 상종하지 말아야 할 존재인 ‘개’를 예수님이 직접 이들 모녀를 향해 사용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게 말이나 되는 것일까요?

결론부터 말하면 이 이야기는 비유의 일종입니다. 예수님의 직접적 표현이라기 보다는 비유로 해석하는 것이 옳습니다 (R, T. France, p298). 예수님이 이 비유를 하신 것은 예수님의 전체적인 구속계획을 말씀하시는 것임과 동시에 그 구속사업은 예수님이 계시는 동안 완성하실 것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마가가 속한 공동체가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이 함께 신앙생활을 하고 함께 고난을 받았던 로마교회라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글도 그들이 최초의 독자였습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에 보낸 편지에서 복음이 유대인과 헬라인 모두에게 복음이 전해져야 할 것이고 자신이 모두에게 복음의 빚진자라는 점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롬 1:16).

복음은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이방인)에게나 공평한 것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의문점은 풀리지 않습니다. 헬라인(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해져야 한다면 왜 예수님은 굳이 그런 표현으로 먼저 자녀에게 배불리 먹여야 할 것을 이야기 하셨을까요?

그래서 독자들에게 마가복음을 좀 더 범위를 확대해서 읽어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오병이어의 기적(6:30~44)과 칠병이어의 기적 (8:1~10) 사이에 들어 있습니다. 첫번째 오병이어의 기적은 유대 땅에서 행하신 것이고 유대인들이 그 혜택을 받았습니다.  대부분의 성경학자들은 8장의 칠병이어의 기적이 이방 땅에서 이루어진것에 동의하는 것으로 볼 때 칠병이어의 기적은 이방인을 위한 잔치였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할지니”라고 표현 한 것은 완성되지 않은 사건이 아니라 이미 종료된 사건으로 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의 미 말씀은 명령어 인데 이미 행위가 종료된 것을 의미하는 헬라어 시제 (aorist)를 사용하였습니다. 이 부분을 직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너는 자녀로 먼저 배불리게 한 것을 허락하라[이해하라!]” (ἄφες πρῶτον χορτασθῆναι τὰ τέκνα (아페스 프로톤 초르타스데나이 타 테크나). 실제로 오병이어 이야기는 “다 배불이 먹고” (막6:42)라고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 이후에 이어지는 칠병이어 사건에서는 이방인들이 “배불리 먹고” (막8:8)  모두 만족합니다.

만약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 비유를 그대로 표현한다면, 예수님이 이제 말씀하시는 것은 별도로 이방인을 위한 잔치가 준비되었다는 복음이기도 합니다. 이 복음의 첫번째 수혜자가 바로 이여인의 딸인 셈이지요. 예수님은 자녀들의 떡을 취해 그들이 ‘개’라고 여기는 유대 땅 주변의 이방인들에게 준 것이 아닙니다. 그들에게도 그들을 위한 빵을 준비하신 것이지요. 결국 예수님이 ‘자녀’와 ‘개’를 차별적으로 표현하여 한 쪽은 존귀한 존재이고 다른 한 쪽은 비천한 존재로 영원히 남아 있도록 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빵으로 이들을 ‘개’라는 천한 신분으로부터 ‘하나님의 자녀’라는 존귀한 존재로 바꾸어 주고자 하는 역설적인 표현이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개는 큰 개가 아닌 ‘강아지’로 표현하였는데 이는 지금 예수님의 능력이 간절한 사람은 결국 그 여인의 어린 딸이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절정: 강아지가 부스러기를 먹는다

비유로 말씀 그 이야기를 이 여인이 알아들었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여인에게 비천한 자신에 대한 자괴감을 더할 수도 있고, 그녀로 하여금 절망감을 줄 수도 있는데 결과는 정반대였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이 비유로 하신 그 말에서 오히려 문제해결할의 실마리를 얻은 것 같습니다. 그 여인은 예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헬라어 원어를 직역하면, “주여! 어린아이들의 부스러기로부터 식탁 아래의 강아지들이 먹습니다” (막7:28).

한글 성경에는 “옳소이다” (Ναί, (나이))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는데, 원본에는 그 단어가 없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녀라고 표현한 그 단어를 택한백성, 즉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칭하는 ‘테크나’ (τέκνα)를 사용하셨는데 이 여인은 그 단어를 일반적인 어린이를 나타내는 ‘파이디온’ (παιδίον)을 사용하였다는 점입니다. 두 단어는 매우 다른 의미를 지닙니다. 앞서 예수님이 자녀라고 말한 것은 연령의 문제가 아니라 신분의 문제였습니다. 즉, 신분상 하나님의 자녀를 말하는 것으로 대표적인 예로 마가복음 2장에서 친구들에 의해 들것에 들려온 중풍병자를 향해 예수님이 ‘테크나’라고 불렀습니다 (막 2:5참조). 그런데 이 여인은 예수님의 말을 받아 이스라엘 민족을 의미하는 단어가 아닌 어린아이라는 개념으로 확대를 합니다. 여기서 ‘파이디온’이라는 단어는 법적으로 행위무능력자를 의미하며 그가 한 행위가 유효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대리인이 필요한 사람을 말합니다. 성경은 이 여인의 입을 빌어  하나님 자녀의 개념을 확대하고자 시도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여인의 말을 살펴보면 예수님과 여인이 동시에 무언가 같은 것을 보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줍니다. 이 여인이 매우 일반적인 표현을 쓴 것인지 아니면 당시에 이들 눈 앞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동사를 현재형으로 사용하였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헬라어에서 현재형은 보통 영어로 현재 진행형으로 번역을 합니다. 지금 눈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을 설명하는 것이지요. 만약 그렇다면, 이렇게 의역될 수 있습니다. “주여! 어린아이들이 먹으며 만들어낸 부스러기를 식탁 아래 있는 강아지들이 먹고 있습니다.” 여인이 이렇게 상황을 설명하는 것은 그녀가 예수님을 향해 “우리도 공짜로 당신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것 아닙니까?”라는 질문을 포함한다고 생각됩니다.

결론: 회복

29-30절을 읽으십시오. 여인의 이야기를 들은 예수님은 즉각적으로 화답하십니다. “이 말을 하였으므로 가라! 귀신이 네 딸로부터 나갔느니라!” 예수님의 이 말씀에서 유의하여 해석하여야 할 곳이 두곳이 있습니다, 한 곳은 “이 말을 하였으므로” (διὰ τοῦτον τὸν λόγον (디아 토우톤 톤 로곤))입니다. 이는 어뜻 보기에 여인의 이 고백이 귀신이 나가게 한 결정적인 것처럼 들립니다. 그렇다면 여인이 이 고백을 하지 않았으면 아이에게서 귀신이 나가지 않았을까요? 이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그 다음의 표현에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음에 딸에게서 귀신이 나간 것의 시제를 완료형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고백 이전에 이미 딸은 귀신이 없어져 있는 상태라는 것이지요. 즉, 이 고백은 예수님 곁을 떠나 귀신이 떠나 온전해진 딸에게로 가기 위한 예수님의 명령이 내려지는 조건일 뿐 그것이 딸에게서 귀신이 나가게 하는 조건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것은 이미 28절에서 이 여인이 은혜를 받는 것이 어떤 행위가 아니라 선물이라는 사실을 알았다는 것을 밝힌 바 있습니다. 결국 예수님이 굳이 두로에 와서 그 여인에게 노출이 되고 그 여인을 만나게 된 것도 모두 은혜라는 점이지요. 이 여인은 은혜를 깨달아 그 은혜를 고백했을 뿐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자신의 행하고자 하신 구원을 베푸신 것이고요. 우리의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인간은 믿음조차 그 은혜에 더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앞에서 무력한 존재임을 고백하는 것뿐이지요. 사도바울은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실에 대해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2장 1절에서 9절로 결론을 맺겠습니다.

1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2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4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7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엡 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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