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esus' disciples
April 27, 2015 | by B2B Missions
[성경올바로이해하기시리즈1]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막8:14~21) (마가복음 21)

예수님의 가르침은 늘 명쾌하게 해석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선문답하듯 툭툭 던지는 말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적어도 독자들의 입장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읽다 보면 아무리 많은 배경 지식을 갖고 있더러도 도저히 수수께끼같아 해석이 쉽지 않은 내용들이 많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의 본문인 마가복음 8장 14절~21절도 예수님이 어떤 의도로 이런 말씀을 하셨는지 그 뜻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물론 ‘바리새인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15절)라는 확실한 명령이 있으니 그것을 제자들에게 분명히 하고 싶었던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으나 그것에 국한하여 보기에는 뭔가 찜찜한 구석이 없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본문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이 본문이 마가복음 전체에서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 이 가르침의 대상이 누구인지 등등에 대한 파악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성경본문 (8:14~21)

  1. 제자들이 떡 가져 오기를 잊었으매 배에 떡 한 개 밖에 저희에게 없더라
  2. 예수께서 경계하여 가라사대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신대
  3. 제자들이 서로 의논하기를 이는 우리에게 떡이 없음이로다 하거 늘
  4. 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 떡이 없음으로 의논하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
  5.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지 못하느냐
  6. 내가 떡 다섯 개를 오천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바구니를 거두었더냐 가로되 열 둘이니이다
  7. 또 일곱 개를 사천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광주리를 거두었더냐 가로되 일곱이니이다
  8. 가라사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하시니라

마가복음에서의 본문의 위치

마가복음의 전반부 이야기는 크게 유대 갈릴리지역에서의 사역 (1:14~7:23)과 이방땅에서의 사역 (7:24~8:10)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한편, 후반부 이야기는 본격적으로 제자들에 집중하시는 소위 ‘제자훈련사역’ (8:27~10:52)과 사회의 각 이해관계집단들과의 갈등과정 (11:1~13:37)을 거친 후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시는 이야기 (14:1~16:8)고 구성되어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사실상 군중들을 향한 사역을 마무리하시고 제자들에게 집중하는 단계로 넘어가는 중간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방땅(두로, 시돈, 데가볼리, 갈릴리 호수 동편)에서의 사역을 마무리하신 후 본격적인 제자훈련을 하기 직전까지 세편의 에피소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세편의 이야기는 매우 짧지만 어떤 이야기보다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그 의미를 찾아내는 것은 성경을 읽는 우리 독자들의 몫이지요. 그 세편의 연속되는 에피소드는 다음과 같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다 (8:11~13); 바리새인과 헤롯의 누룩에 대한 경고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을 향한 책망 (8:14~21);벳새다에서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심 (8:22~26)

첫번째 에피소드인 바리새인과의 갈등은 오병이어의 기적 직후에 기록된 바리새인들과의 갈등과 맞닿아 있습니다. 즉, 마가는 의도적으로 오병이어의 기적 (6:30~44)과 배를 타고 이동(6:45~52) 하신 이후, 바리새인들과의 갈등내용(7:1~13)을 기록한 것과 유사하게 이방땅에서의 칠병이어의 기적(8:1~9)과 배를 타고 이동(8:10)하신 후 바로 바리새인들과의 갈등내용(8:11~13)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8장 11절~13절 내용은 이방땅에서의 사역을 마무리(wrap-up)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부분을 이관점에서 해석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바로 뒤이어 바리새인들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했다고 이 부분(8:11~13)을 그것으로 연결시켜 해석하는 분들이 종종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두번째 에피소드와 세번째 에피소드는 예수님의 일반 대중을 향한 사역에서 제자훈련으로 넘어가는 짐검다리 역할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해석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같은 복음서 전체에서의 위치를 고려하여 본문의 의미를 본격적으로 알아보기로 하겠습니다.

사건의 발단: 떡이 없다! (14)

바리새인들과 약간의 갈등을 겪은 후 예수님 일행을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셨습니다. 여기서 건너편이라 함은 달마누나(8:10절)를 기준으로 갈릴리 호수 건너편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에피소드가 시작됩니다.  14절에서 마가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떡 가져오기를 잊었으매 배에 떡이 한개 밖에 그들에게 없었더라” (14절).

제자들은 서로 떡이 얼마나 있는지를 확인한 모양입니다. 그랬더니 떡이 달당 한개 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배에 몇 명이 타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만약 떡이 한개 뿐이면 예수님의 공동체가 굶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위기를 제자들이 느꼈음은 분명합니다. 이 현실은 제자들로 하여금 불안하게 만든 것 같습니다. 사실 제자들이 배를 타고 이동하는 과정은 평탄한 과정이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대개 폭풍과 파도, 즉 외부의 불가항력적 힘이 그들을 위협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번 먹을 것이 부족한 문제는 준비만 철저히 했어도 당하지 않을 문제였습니다. 마가는 굳이 제자들의 심리적 감정상태를 기록하고 있지 않았지만 그들은 아마도 적지 않이 당황했을 겁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누룩을 주의하라는 말에(15) 떡 문제를 걱정했으니까요(16절).

‘배에 떡이 한개 밖에 없다.’ 그래서 ‘큰일났다’라는 제자들의 생각은 앞으로 그들의 모든 행동에 영향을 줍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메시지를 아주 곡해하고 자신들의 생각대로 자신들의 처지에 맞추어 해석하는 결과를 가져오지요. [이것이 오늘 성경을 이해하는 요점입니다. ]

사건의 전개: 예수님의 경고 (15)

제자들이 빵이 턱없이 모자라는 문제로 고민을 하고 있는데 예수님이 갑자기 말씀을 하십니다. 15절을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경계하여 가라사대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신대” (15절)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바리새인들의 누룩이 무엇이고 헤롯의 누룩이 무엇인지는 아직 구체적인 설명이 없습니다. 많은 학자들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록의 의미를 찾으려고 노력을 합니다. 우리는 바리새인들의 누룩에 대해서는 쉽게 찾아 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동안 바리새인들의 율법적인 공격을 많이 받았기 때문입니다. 또, 이 배에 오르기 직전에도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 대하여시험을하고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보여달라고 힐난을 했기 때문이지요 (8:11참조). 하지만, 헤롯왕(헤롯 안티파스를 말함)과는 갈등이 있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굳이 이들의 누룩이 무엇이냐?를 찾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자인 마가와 이 명령을 하신 예수님 조차 그 누룩의 의미를 설명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마가복음은 제자들의 반응과 예수님의 질책에 촛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독자인 우리도 지엽적인 문제에 매달리기 보다는 전체적인 흐름에 촛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사건의 위기: 제자들의 아전인수식 해석 (16)

예수님의 말씀에 제자들이 보인 반응은 전체 말씀의 흐름을 바꾸어 버립니다. 사실 제자들은 예수님이게 “바리새인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의 의미를 상세히 설명해 달라고 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전혀 엉뚱한 반응을 보입니다. 16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이 서로 의논하기를 이는 우리에게 떡이 없음이로다 하거늘” (16절).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이라고 말씀하시자 그들의 귀에는 ‘누룩’만 들린 것입니다. 당시 누룩은 주로 빵을 만드는데 사용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냥 빵과 누룩을 연결시킨 것이지요. 이것이 대표적인 ‘문자주의’식의 해석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의 의미를 정확히 파악하려는 노력은 하지 않고 자신들의 문제에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 일부를 가져와서 ‘문자적’으로 이해한 것입니다.

우리는 어떠한가요?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여 하나님의 뜻을 자신의 생각에 맞추려 하지는 않나요? 실제로 한 형제의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위암말기 선고를 받은 그는 점점 다른 곳으로 전이되는 암세포들로 인해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병원에서는 손을 쓸 수가 없는 상황이라고 이미 선언을 했고 진통제 주사를 놓아 주는 것 외에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그 형제는 매일같이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병원에 입원해 있는 그 형제에게 병문안을 갔을 때 그형제는 다음과 같이 하소연을 했습니다.

“예수님이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개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라고 약속하셨는데 왜 제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렇게 기도하는 것은 안들어 주는 것인가요?”

저는 참으로 답답했습니다. 무어라 말을 할 수 없었지요. 자신의 병이 위중하고 생명이 경각에 달린 사람들은 누구나 하나님의 말씀에 담긴 하나님의 뜻, 진정한 의미를 아는 것보다 그것을 자신의 현실에 그냥 적용하려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것을 나무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거짓말장이가 아니고, 암이 점점 더 퍼져나가 살 소망이 끊어졌는데도 하나님이 돌보지 않으신다면, 오히려 그가 적용한 말씀의 의미를 자신이 왜곡하고 있다는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데 현실은 그럴 수가 없는 것이지요. 현실이 중요하니까요. 이렇듯 설교자들도 성도들의 현실적인 문제를 외면할 수 없기 때문에 말씀을 아주 쉽게 왜곡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처한 현실과 어떻게 해서든 억지로 맞는 적용을 하려고 하는 유혹에 빠지지요. 그렇게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성도들은 말씀과는 전혀 동떨어진 비진리를 받아들이게 됩니다.

여기서 제자들이 그랬습니다. 제자들은 부족한 빵문제에만 온통 신경을 쓰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이라고 말씀하시자 이들에게는 ‘누룩’이라는 단어만 들린 것이지요. 오늘의 본문이 이야기하고자 한 것도 바로 “바리새인들의 누룩이나 헤롯의 누룩”이 아닌 제자들의 ‘난청’(잘 알아듣지 못함)에 대한 문제입니다. 이들이 왜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을까요? 그것은 자신들의 문제에 춧점을 맞추어 말씀을 이해하려 때문입니다.

사건의 절정: 예수님의 책망 (17-20)

제자들이 ‘누룩’을 ‘빵’문제로 연결시키자 예수님이 제자들을 책망하십니다. 17절과 20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 떡이 없음으로 의논하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지 못하느냐 내가 떡 다섯 개를 오천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바구니를 거두었더냐 가로되 열 둘이니이다 또 일곱 개를 사천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광주리를 거두었더냐 가로되 일곱이니이다” (17-20절)

예수님은 제자들이 자신이 말씀하신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말씀을 이해하는 것을 보고 제자들을 책망하십니다. 17~20절을 읽으면 저자인 마가가 이 에피소드를 기록하게된 의도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 책망은 다음부터 전개될 이야기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앞에서 필자는 이 에피소드가 예수님의 공생애 전반부와 후반부(갈릴리와 이방사역을 마치고 제자훈련단계)를 연결하는 짐검다리 역할을 한다는 사실에 대해 언급한 바 있습니다.

수 많은 이적들과 수 많은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여전히 예수님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아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세계관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이 이 에피소드를 통해 증명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제자들의 이러한 점을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이 사건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의 귀를 열고 마음을 열어 예수님이 누구인지 예수님의 행하시는 이적의 의미와 진리에 눈을 뜨기를 바랬던 것입니다. 바로 이어지는 사건에서는 제자들 앞에서 한 맹인의 눈을 뜨게 하는 사건을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이어서 그 유명한 베드로의 고백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8:29)과 제자도, 즉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시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8:34)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예수님을 진정으로 그리스도로 고백고 예수님의 뒤를 따를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이 그들의 마음을 깨우쳐 들을 귀를 만들어 주시고 눈을 열어 진리를 올바로 분별할 수 있도록 했기 때문입니다.

17~18절에서 예수님은 연속되는 네번의 질문을 하십니다.첫번째 질문은 “너희가 어찌 떡이 없음으로 의논하느냐?”입니다. 이 말씀은 ‘너희가 떡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논쟁거리로 삼고 있느냐?’라는 으미입니다. 예수님의 이 질문은 ‘떡은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이 세상의 것을 근심걱정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의 것에 집착을 하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도 세상의 것으로 해석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이미 성경은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이 세상의 수 많은 처세술과 관련된 구 많은 책들중 하나가 되고 맙니다.  사실 이 질문에 대해 예수님은 18절 하반절~20절 사이에 제자들과 질의 응답을 통해 간단하게 해소를 하십니다. 나머지 세번의 질문을 살펴보기 전에 18절 하반절~20절을 먼저 읽어보겠습니다.

“또 기억지 못하느냐 내가 떡 다섯 개를 오천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바구니를 거두었더냐 가로되 열 둘이니이다 또 일곱 개를 사천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광주리를 거두었더냐 가로되 일곱이니이다” (18하~20절).

두번째 질문으로 넘어가 보지요. “아직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라는 질문은 단순히 예수님이 지금 그들에게 하고 계신 그 말씀을 깨닫지 못하느냐?라는 질문이 아닙니다. 여기에 ‘아직’ (οὔπω, 오우포)이라는 말씀을하신 것은 지금까지 예수님을 따르던 모든 시간 동안 보여 주고 가르치고 했던 모든 것에 대한 깨달음이 없음을 질책하시는 것이지요. 예수님의 이 질문으로 유추하건데 제자들은 그 때까지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의 의미도 수많은 가르침의 의미도 온전히 알지 못하고 있음을 할 수 있습니다. 아직까지 그들에게는 세상적인 문제가 더 중요하게 보인 것이고 예수님도 자신들의 세계관 범위내에서 이해를 하였던 것이지요.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랫동안 교회를 다닌다고는 하지만 진리를 온전히 붙들고 예수님의 제자로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는 것 보다는 주고 받기식(give and take)의 신앙에 머물고 있는 분들이 많습니다. 내가 이렇게 지극정성으로 하나님을 섬기면 하나님은 나에게 큰 복을 주실 것이라는 신앙 말이지요. 지금 이 본문에서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책망을 하시면서 던지신 질문이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세번째 질문입니다. “너의 마음이 둔하냐?” 예수님은 제자들이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원인을 마음에 두고 있습니다. 여기서 “너희 마음이 둔하냐?로 번역된 헬라어 원문은 “πεπωρωμένην ἔχετε τὴν καρδίαν ὑμῶν;” (페포로메넨 에케테 텐 카르디안 후몬?)입니다. 이 말을 직역하면 “너희가 강팍하게 된 마음을 갖고 있느냐?”입니다. 강팍하게 되었다는 말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적인 세계관에 마음이 오염되어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도 그 의미를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자신이 마음의 의도대로 마음대로 성경을 곡해한다는 의미입니다.

오늘날의 우리는 어떠한가요? 우리는 어느덧 우리시대의 세계관에 젖어 살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지식들이 아무런 거리낌 없이 진리로 받아들여지고 있고 성경도 수많은 진리중의 하나로 이해되고 있다면 우리는 이미 이 세상의 논리에 물들어 있는 것입니다. 신자유주의, 포스트모더니즘 등과 맞물려 교회에는 어느덧 번영신학이 아무렇지도 않게 자리하여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고, 절대진리를 주장하는 것은 이미 고리타분한 배타주의자로 낙인찍히는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자신의 생각을 말하되 남의 의견도 존중하고 받아들여라!” 이런 주장은 세상에서는 통할지 몰라도 절대진리이신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런 힘이 없는 인간들의 생각일뿐입니다. 구원이 배타적일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다른 구원을 받아들이는 순간 예수님의 십자가는 설 곳이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그 길만이 유일한 길이고 진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지요.

이제 네번째 질문으로 넘어가겠습니다.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예수님의 이 마지막 질문은 복음서 전체를 흐르고 있는 질문입니다. 사실 예수님이 군중들을 대상으로 비유로 말씀을 많이 하셨는데 그 주된 이유가 그들로 하여금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마가복음 4장 10~12절을 읽어보겠습니다.

10 예수께서 홀로 계실 때에 함께한 사람들이 열 두 제자로 더불어 그 비유들을 묻자오니  11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 12 이는 저희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시고” (막 4:10-12).

이 말씀에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은 제자들이 아닌 예수님의 말씀이 어렵다고 그 자리를 떠난 군중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지금 제자들에게 이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적어도 제자라고 하는 당신들은 나의 말의 의미를 알아야 할 것 아닌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계시는 것이지요.

우리들은 설교의 홍수, 성경공부의 홍수 속에 살고 있습니다.  언제 어디서든 원하기만 하면 성경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원하면 동영상으로 볼수도 있고, 글로 읽을 수도 있으며, 조금만 시간을 내면 수 많은 세미나 등 강연에 직접 참여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요즈음 진리에 접근하여 진리를 올바로 깨닫는 사람들보다 진리로부터 멀어지는 경우가 너무도 많습니다. 풍요속의 빈곤이라고나 할까요? 말씀은 홍수처럼 넘치는데 사람들은 진리를 애써 외면하고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대신, 자신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하는 메시지에 익숙해 있고 자신에게 쓴 소리로 다가오는 메시지에는 눈을 감고 귀를 돌려버립니다.

사건의 결말: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21)

이 에피소드는 아주 짧은 질문으로 마무리됩니다.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예수님의 이 질문은 앞으로 진행될 제자훈련의 핵심 질문이기도 합니다. 이후 제자훈련과정의 핵심주제인 셈이지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보여주고 깨닫게 하는데 제자들은 늘 자신들의 생각에 사로 잡혀 예수님의 말씀을 전혀 이해하지 못합니다. 예를들어 베드로가 예수는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8:29)라고 고백을 할 때에도 그들의 머리 속에는 정치적 지도자로써의 예수님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시고 사흘만에 살아나셔야 한다는 말에 베드로는 화들짝 놀라 예수님을 나무라며 말립니다. 제자들이 그랬습니다.

이 에피소드는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이 무엇인지를 설명해주시기 위한 가르침이 아니라는 것을 이미 읽었습니다. 이 에치소드는 3년여를 예수님 곁을 지키며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아직 세상의 세계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제자들의 현실을 스스로 개닫게 하고자 한 말씀입니다.

얼마나 오랫동안 예수님을 믿었습니까?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그리스도를 제대로 알고 제대로 믿고 있나요? 아니면 내가 상상한 하나님, 내가 원하는 그런 하나님의 모습을 나의 삶속에서 구현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나요? 만약 진리이신 예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면 어쩌면 우리는 예수님이 아닌 나만의 우상을 예수님으로 착각하고 섬기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각자 스스로의 신앙을 돌아보시는 것이 어떨런지요? [B2B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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