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에서 주무시는 예수님
March 7, 2015 | by B2B Missions
[성경올바로이해하기시리즈 1] 제자들이 만난 풍랑은 우연이었을까? (막 4:35~41) (마가복음 15)

‘성경에 기록된 초자연적인 사건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이 질문은 이 땅에 교회가 세워진 이래 한번도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유효하다는 말이지요. 예수님의 기적은 예수님 당시에 그 사건을 실제로 목격한 사람들로부터 시작해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한 관점에서 해석되어지고 이해되어져 왔습니다. 따라서 어느 한 관점만을 주장하게 되면 매우 편협된 생각의 소유자라고 비난을 받게 되고, 다양한 의견을 모두 수용하면 예수님이 진정으로 그 사건을 보여 주신 목적이 희석되어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데 실패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성경에 나오는 이적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는 길은 없는 것일까요?

방법은 있습니다. 단 두가지 기준만 확고하게 갖고 있어도 하나님의 뜻에 접근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첫째로, 성경말씀을 아무런 거름장치도 없이 나의 삶으로 직접 가져와 적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이야기가 나의 삶과 아무리 유사할지라도 나의 삶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삶을 설명하고 있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입니다. 두번째, 성경의 이야기는 우선 성경을 최초로 읽는 독자들 (1차독자들)에게 전한 글이라는 점입니다. 따라서 ‘그들이 성경의 이야기를 어떻게 이해했고 어떻게 적용했느냐?’를 찾아 내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를 위해서는 글이 쓰여 질 당시 사회문화적 이해, 교회가 처해있던 역사적 현실은 물론 당시 문체, 문법, 단어 등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필요합니다. 많은 분들이 신학을 하지 않은 성도들이 이런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는 질문을 합니다. 물론 맞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성경을 가르치는 분들이 적용에만 치중했지 성경의 실체적 진실을 이해하는 방법을 성도들에게 가르치지 않았다는 말이됩니다. 다사말하면, 물고기를 잘 요리해 주었지 물고기 잡는 방법을 안가르친 것이지요. 하지만, 가르치는 사람들이 늘 올바른 성경이해를 위한 방법을 성도들에게 가르치면 언젠가는 일반성도들도 그러한 성경 이해방법에 익숙하게 되고 결국은 성경의 진리에 접근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다고 믿습니다. 이제 마가복음 4장 35절~41절 말씀으로 들어가겠습니다. 마가복음 4:35~41입니다.

35 그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36 저희가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 37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부딪혀 배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38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시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가로되 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 된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39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 지더라 40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41 저희가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저가 뉘기에 바람과 바다라도 순종하는고 하였더라” (막 4:35-41).

굳이 저녁에 바다를 건너야 했는가?

이 말씀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예수님이 바닷가에서 사람들을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은 배위에 올라서 말씀하셨고 수 많은 무리들은 언덕에서 들었습니다. 예수님이 씨뿌리는 비유을 말씀하시자 많은 사람들이 자리를 떠났고 제자들과 일부 사람들만 남아 계속해서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날 저물 ” 예수님이 갑자기 제자들에게 갈릴리 바다 “저편으로 건너가자”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순종하여 배를 저어 바다를 건너려 하였습니다. 제자들 뿐 아니라 끝까지 그곳에 남아 있던 다른 사람들도 작은 배들을 타고 예수님 일행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광풍과 파도가 일어나 배들을 덮쳐왔고 제자들은 마침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웠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일어나셔서 바람을 꾸짖으셨고 바다를 향해 ‘잠잠하고 고요하라’ 하셨습니다. 그러자 바람이 그치고 바다는 아주 잔잔해졌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 믿음이 없음을 지적하였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서로를 향해 “저가 뉘기에 바람과 바다라도 순종하는고”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이야기의 전말입니다.

많은 설교가들이 ‘인생의 풍파를 만났을 때 예수님께 매달리고 기도하면 그 풍파는 사라지고 온전한 평강이 찾아 올 것’이라는 취지로 설교를 합니다. 물론 내용상 그것이 틀린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 에피소드가 과연 그렇게 해석될 수 있는지 이제부터 알아 보기로 하지요.

이 이야기 바로 뒤를 보면 예수님 일행은 바다 건너편 거라사인의 지방에 이르게 됩니다. 그곳에서는 무덤 가운데 있는 군대귀신들린 자를 만나게 되고 그로부터 귀신을 쫒아내십니다. 그리고 그에게서 나온 귀신들은 돼지들에게 들어가고 돼지들은 바다에 빠져 몰살하게 되지요. 그러자 그 마을 사람들이 그 지방에서 떠나실 것을 간구하였고 예수님은 그곳을 떠나 다시 갈릴리로 돌아 오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하신 일은 군대귀신 들린자를 만나 귀신을 쫒아내신 일입니다. 단 한 사람을 귀신으로부터 해방하기 위해 예수님은 공동체 전체를 풍랑이 이는 바다가운데로 인도한 격이지요. 단순히 그런 목적이라면 왜 예수님은 다른 날을 택하지 않고 밤에 그곳을 건너가야 하셨을까요? 그리고 풍랑은 무엇이며 그들이 무덤가에서 만난 그 군대귀신들린 사람은 누구일까요?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무엇을 보여주려 한 것일까요? 이런 질문들이 꼬리를 물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는 본문에 나오는 내용을 토대로 일부 질문들에 대해 답을 찾아 볼까합니다.

 계획된 사건인가? 예수님도 몰랐던 일일까?

먼저  이 사건이 예수님의 계획안에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하필이면 ‘운이 나빠서’ 그날 따라 세찬 풍랑을 만났을까요? 만약 예수님이 모든 것을 다 아셨고, 그것도 예수님이 치밀한 계획하에 일어난 것이라면 풍랑은 예수님의 작품이라는 말이 됩니다. 그리고 풍랑이 예수님의 작품이라면 제자들 그리고 그들과 함께 갔던 다른 사람들이 어려움에 처하게 된 것도 예수님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물론 풍랑도, 파도도 사탄의 짓이 아니라 예수님이 하신 것이 됩니다. 문제는 그렇게 해석하면 당시 당했던 사람들이나 오늘날 이 사건을 읽는 독자들이 매우 혼란스러울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정반대로 이번에는 예수님도 이런 일이 일어날지는 꿈에도 몰랐고, 본인도 많이 당황했으며, 제자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을 것이라고 가정을 해보지요. 그렇다면, 예수님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한치 앞도 내다 보지 못하는 그 분을 우리가 믿는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지요. 한가지 절충안이 나올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미리 아셨지만 충분히 해결할 능력도 있고, 아무런 문제없이 지나갈 수 있기에 계획대로 바다로 갔다는 가정입니다. 일리가 있는 가정입니다. 당신은 무엇이 옳다고 생각합니까? 아무래도 두번째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첫번째 가정이나 세번째 가정 중에 하나를 택해야 할 것입니다. 여기서는 세번째에 입각하여 해석을 할 생각입니다.

답은 본문에 들어 있습니다. 35절말씀을 읽겠습니다. “그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 말로 번역할 때에는 원어인 헬라어가 지니는 문법상 매우 중요한 관점(aspect)을 모두 반영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사실상 우리 말로는 표현할 수 있는 길이 없을 때도 있습니다. 여기서 그런 내용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우리가…건너가자”라는 동사의 헬라어 원어는 ‘디에르코마이’(διέρχομαι)의 변형인 ‘디엘도멘’(διέλθωμεν)입니다. 여기에 우리가 모르는 문법이 숨겨져 있습니다. 변형된 ‘디엘도멘’에는 ‘말하는 사람이 이미 사전에 계획된 것을 실행에 옮긴다’는 의미가 숨겨져 있습니다. 예를들어, 회사에서 어떤 팀회의를 마치고 식사를 함께 하러가기로 했고 그 회의가 끝나자 팀장이 ‘자 그럼 식당으로 자리를 옮길까?’라고 제안을 했다고 합시다. 이 때 팀장의 제안은 이미 계획된 것을 실행에 옮기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밤에 제자들 및 그들과 함께 한 다른 몇몇 소수의 인원과 함께 풍랑이 휘몰아치는 바다를 건널 계획을 하셨던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을 아셨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그곳을 건너려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미리 계획하시고 제자들을 어려운 환란이 기다리는 바다 한가운데로 배를 저어 가도록 하셨습니다.

공동체의 위기인가? 개인적인 사건인가?

36절과 37절을 읽으십시오. “저희가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부딪혀 배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저희라 함은 ‘제자들’입니다. 그런데 그 일행에는 예수님도 강연하시던 배에어 내리시지 않고 함께 하셨으며, 심지어 제자들이 아닌 남아 있던 다른 배들도 함께 하였습니다. 따라서 이는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고 공동체가 함께 겪었던 문제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많은 주석가들은 이 사건을 당시 저자인 마가가 처해있던 교회공동체의 운명을 보여 주는 사건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당시 마가는 베드로와 함께 로마에 있었으며, 마가가 이 복음서를 쓸 당시에는 네로황제의 기독교 핍박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점이었습니다. 로마정부의 무자비한 핍박으로 인해 교회는 공동체 전체가 와해되고 사라질 위기에 직면하였습니다. 당시 로마에 함께 했던 베드로도 아시아 지역에 있는 교회들에게 편지를 하면서 다음과 같이 권면하였습니다.

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13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14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적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16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17 하나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이 어떠하며 18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얻으면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 어디 서리요 19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 영혼을 미쁘신 조물주께 부탁할찌어다 (벧전 4:12-19).

예수님은 이들이 고난을 받을 것도, 많은 사람들이 죽어갈 것도 이미 아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명령하신대로 예루살렘과 온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그 순종한 결과가 바로 이러한 환란이었습니다. 사실 예수께서는 마지막날 밤 제자들에게 이렇게 권면하셨습니다. 그 권면은 말하는 이에게도 듣는 이에게도 너무 가슴 아픈 이야기입니다. 한번 들어 보기로 하지요. 요한복음 16장입니다.

1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실족지 않게 하려 함이니 2 사람들이 너희를 출회할 뿐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 하리라 3 저희가 이런 일을 할 것은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함이라 4 오직 너희에게 이 말을 이른 것은 너희로 그 때를 당하면 내가 너희에게 이 말 한 것을 기억나게 하려 함이요 처음부터 이 말을 하지 아니한 것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었음이니라… (중략)…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중략)… 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우리는 이 요한복음 말씀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위해 잡히기 직전 제자들에게 당부한 말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제자들과 제자들이 전한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는 교회공동체 전체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환란과 핍박을 당했고, 수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마가와 함께 한 베드로는 그날 밤 갈릴리 호수의 풍랑을 어떻게 이해했을까요? 그는 그 자리에서 이 사건을 직접 겪은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개입과 평안

다시 마가복음 본문으로 돌아가지요. 38절을 읽으십시오.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시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가로되 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 된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풍랑이 이는대도 예수님은 잠을 주무시고 계십니다. 사실 말이 안되는 일이지요. ‘어떻게 모든 배와 그곳에 탄 사람들을 삼켜 버릴듯한 풍랑과 파도가 일어났는데도 예수님은 잠을 주무실 수가 있느냐?’라는 질문을 던져 보아야 합니다. 아무리 피곤하셔도 그렇지 그 풍랑이 이는 작은 배에서 제자들이 깨울 때까지 잠을 주무신다는 것은 단순히 그냥 생리적인 현상으로 주무신다는 것으로 이해하기에는 무언가 석연치 않은 면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주무시는 이 모습을 어떻게 이해하는 것이 좋을까요? ‘어떻게 예수님은 이토록 태연하실 수 있을까?’ ‘제자들이나 교회가 애매히 당하는 고통을 모르시는 것은 아닐까?’ 라는 식의 해석도 가능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 교회공동체가 당하는 환란이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예수님이 뜻하신 일을 성취하기 위한 것이라면 언젠가 예수님은 공동체에 개입을 하셔서 승리하실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고 제자들은 그것을 기억하신 것입니다. 너무 힘들고 어려울 때 우리 몸의 부활 궁극적인 승리를 이야기했던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의 마지막에 이렇게 말합니다. “마라나 타” (μαράνα θά).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 (고장 16:22). 마가는 자신이 속한 로마교회의 비참한 현실을 보면서 예수님의 개입을 절실히 원했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공생애를 사시는 동안 풍랑이 휘몰아치는 바다 가운데로 그들을 데리고 가서 정작 예수님은 주무셨던 그 때, 그 절망 가운데 예수님을 흔들어 깨우던 모습을 상상했을지도 모를일입니다. 또 마가의 기록을 처음 접하는 당시의 성도들도 이 글을 읽으면서 칠흙같은 어두움, 휘몰아치는 광풍 속에서 기도하며 간절히 주를 기다렸을 것입니다.

39절을 읽으십시오. 예수님이 드디어 잠에서 깨어 바다를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를 잠잠케 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를 예수님이 종말론적으로 역사 속에 다시 개입하시고 승리하시는 광경이라고 말합니다. 교회를 괴롭히고 핍박하던 모든 세력들이 예수그리스도의 개입으로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고 물러갑니다. 폭풍은 그쳤고 바다는 쥐 죽은 듯 조용해졌습니다. 마가는 “아주 잔잔하더라”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오셨고 교회는 다시 평화를 찾았습니다.

무엇을 가르치려는 것일까?

40절을 읽으십시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믿음이 없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풍랑을 잠잠케 하신 후 이렇게 말씀하시길 기대합니다. “힘들었지? 고생시켜서 미안하구나. 이제는 안심하거라.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거야!”라고 말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마치 제자들이 큰 잘못이나 저지른 것처럼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을 헬라어 그대로 의역하지 않고 직역하면, “너희들은 왜 그렇게 비겁하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입니다. 이 말은 당시 로마교회 공동체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당시 환란가운데 힘들어 하는 교인들이 그 환란을 피하기 위해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돌아서거나 예수님을 믿지 않은 척 위장을 하는 일들도 많이 생겨났습니다. 한 마디로 비겁한 사람들이 많이 생겼던 것이지요. 이는 그들을 향한 경고의 메시지이자 ‘끝까지 인내하고 견디라’는 격려의 메시지이기도 했습니다. 비겁함이란 자신이 당한 수치나 고통을 피하기 위해 자신의 신념을 포기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 비겁한 사람들을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어려움이 있을 때, 환란이 찾아 올 때, 자신의 믿음을 버리고 싶을 때, 그리스도인들이 취해야 할 자세는 무엇인가요? 동 시대에 같은 상황하에서 기록한 것으로 알려진 히브리서는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2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3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 (히 12:1-3).

성경에 등장하는 ‘인내’라는 단어는 그리스도로 인한 고난을 당할 때, 애매한 고난을 당할 때 참는 것입니다.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 인내하면, 끝내 그리스도께서 승리하신 그 승리를 보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들에게 보여주신 모습입니다.

이제 제자들의 반응을 보겠습니다. 마지막 41절을 읽으십시오. 제자들은 심히 두려웠습니다. 그리고는 서로를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이를 직역하면,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 그는 도대체 누구인가?”입니다. “그가 누구인가?” 복음서 전체의 주제이자 성경전체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성경은 제자들의 이 질문을 통해 당시 이 글을 읽는 사람들, 환란가운데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동일한 질문을 던집니다. “그분이 누구입니까?” 오늘날 이 글을 읽은 우리들에게도 동일한 질문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나 도대체 누구이며, 나에게는 어떠한 존재인가?”

앞선 글에서 살펴 보았듯이 마가복음 4장~5장은 전체가 하나의 주제로 이루어진 글입니다. 주제는 물론 천국이고 천국에서의 열매입니다. 씨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돌밭에 떨어진 그 씨앗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돌밭은 스스로를 개간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개입하시면 열매는 맺히게 되어 있습니다. 환란을 당하고 세상에서 어떠한 풍파가 밀려와도 그리스도가 개입하시면 열매를 맺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아주 잠잠해진 바다를 평안하게 항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이를 개인적으로 적용해 봅시다. 만약 당신이 하나님의 계획 안에 있는 사람이라면 당신의 인생도 하나님의 계획안에 있습니다. 지금 환란을 당했습니까? 당신이 하나님의 계획 안에 있다면, 그 환란 또한 하나님의 계획 안에 있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뒤통수를 맞은 것이 아니라면, 당신의 고난을 통해 주님이 가르치시고자 하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십시오. 그러면 내 삶을 간섭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게 되고 비록 고난가운데 있을지라도 하나님을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B2B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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