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우병여인
March 22, 2015 | by B2B Missions
[성경올바로이해하기시리즈 1] 열두해 그리고 두 여자 (막 5:21~43) (마가복음 17)

바닷가에서의 씨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시작된 예수님의 가르침은 풍랑을 잠잠케 하신 사건, 군대 귀신들린 자를 고치신 사건에 이어 이제 가르침의 마지막 단계에 이릅니다. 저자인 마가는 4장과 5장 두개의 장에 걸쳐 하나님의 나라와 이 땅에 남겨진 교회를 회복하시는 예수님에 대해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그 마지막 단계로 아주 심각한 문제에 처한 두 여자가 등장합니다. 예수님이 그들의 삶에 개입함으로써 그들을 온전히 회복하는 이야기입니다. 어떻게 보면 아주 간단하게 해석할 수 있는 본문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내용을 드려다 보면 단순하게 인생들—특히 믿는자들—이 처한 곤란한 문제를 해결해 주는 해결사 역할을 하는 예수님, 초자연적 능력으로 인간들이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를 하나하나 없애주는 그런 초능력자, 초특급 도우미로 예수님을 이해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할지라도 세상에서 아무런 문제가 없이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심각한 병에 걸리거나,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처할 수도 있고, 가정의 문제, 직장의 문제 등으로 고난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럴 때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께 나가 간구하면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요? 정말 불치병이 낫고, 경제가 회복되며, 집을 나갔던 아이들이 돌아 올까요? 물론 가끔 해결될 수는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니님을 믿는 사람들이 암에 걸릴 확율이나 걸려서 회복될 확율이 다른 종교를 믿거나 아니면 무신론자 보다 훨씬 높을까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잘생각해 보십시오. 세계 최장수 국가이며 세계 최고의 부를 자랑하는 일본의 경우 기독교인 비율이 1퍼센트에도 못미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것을 차별적으로 도와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바로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혈우병 걸린 여인의 이야기가 그런 식으로 해석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오늘의 본문은 기복적 시각으로 해석될 수 있는 성격의 말씀이 아닙니다. 만약에 이 세상의 문제를 해결해준다는 식으로 즉, 기복적 시각으로 이 성경 본문을 해석하면 성경에서 말하고자 하는 의도 즉, 하나님의 뜻을 왜곡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는 정반대의 입장을 설명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본문 본문의 구조이해하기

이제 본문으로 들어가 내용을 하나하나 살펴 보기로 하겠습니다. 먼저 오늘의 본문을 읽어 보겠습니다. 마가복음 5장 21절~43절입니다.

21 예수께서 배를 타시고 다시 저편으로 건너 가시매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이거늘 이에 바닷가에 계시더니  22 회당장 중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 아래 엎드리어  23 많이 간구하여 가로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얻어 살게 하소서 하거늘  24 이에 그와 함께 가실쌔 큰 무리가 따라가며 에워싸 밀더라

25 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한 여자가 있어  26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27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섞여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28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 함일러라  29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30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말씀하시되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시니 31 제자들이 여짜오되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 하되  32 예수께서 이 일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 보시니  33 여자가 제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짜온대  34 예수께서 가라사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35 아직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가로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36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  37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 외에 아무도 따라옴을 허치 아니하시고  38 회당장의 집에 함께 가사 훤화함과 사람들의 울며 심히 통곡함을 보시고 39 들어가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훤화하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40 저희가 비웃더라 예수께서 저희를 다 내어 보내신 후에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을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사  41 그 아이의 손을 잡고 가라사대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심이라  42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나이 열 두살이라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  43 예수께서 이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저희를 많이 경계하시고 이에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라” (막5:21-43).

먼저 본문의 구조부터 보겠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전형적인 샌드위치구조입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게 되어 그의 집으로 향하는 모습이 먼저 등장하고 (5:21~24), 그 중간에 한 혈우병 걸린 여인이 다가와 그 여인이 치유를 받는 사건이 중간에 기록되었고 (5:25~34) 다시 야이로의 딸 이야기가 나옵니다. 언뜻 보면 야이로의 딸 이야기 중간에 예시치 못한 사건이 생겼고 예수님이 그 사건에 신경을 쓰게 된 것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즉, 두 사건은 별개의 사건으로 볼 수 있디는 것이지요. 실제로 많은 설교자들이 두 사건을 하나로 보지 않고 두개의 서로 다른 사건으로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혈우병 걸린 여인, 그래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져 나음을 얻은 여인의 이야기는 잘 기억하면서도 정작 야이로의 딸이야기는 잘 기억하지 못하거나 전혀 다른 말씀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이유는 설교를 들을 때 두 사건을 분리해서 들었기 때문이지요.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두 사건은 한 사건입니다. 마치 한 개의 샌드위치가 두개의 빵과 그 방 사이의 각종 각종 야채, 햄 등등으로 구성된 것처럼 이 이야기도 두 여인이 등장하는 한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성경을 읽는 사람도 한 이야기로 읽어야 합니다.

해석을 위한 본문 관찰

본문을 제대로 관찰하는 것은 올바른 성경해석의 가장 필수적인 절차입니다. 본문을 몇번 반복해서 읽으며 문장구조, 특이한 문법, 단어, 강조되는 것들을 발견해야 합니다. 전체적으로 발견되는 것들을 한번 정리해보고 공동점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이야기의 주인공들이 모두 여자라는 점입니다. 또한 둘 모두 자신의 힘으로는 세상을 살아갈 능력이 없는 연약한 자들이었습니다. 두번째로 십이년이라는 햇수입니다. 혈우병 걸린 여인은 열두해 동안 그 병을 앓아 왔으며, 회당장 야이로의 딸은 열두살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여인이 혈우병에 걸린 해에 아이가 태어난 것이지요.  세번째, 둘 모두 절망적 상황에서 같은 날 예수님을 만나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하였습니다.

이같은 공통점 외에, 열두살 난 어린 아이는 회당장의 딸입니다. 여기서 회당장은 회당을 총괄하는 사람으로 회당에서 집회가 열릴 경우 그것을 관장하는 위치에 있던 사람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본토에 있거나 디아스포라가 되거나 가는 곳마다 ‘시나고그’라 부르는 회당을 지어 안식일에 모여 성경과 자신들의 신앙을 강론하였습니다. 나중에 사도들이 전도를 할 때 가장 중요한 전도장소가 되었던 곳입니다. 이후에 그리스도인들도 회당에 모여 그리스도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예배당 정도로 이해하면 됩니다. 여기서는 회당장이라는 직업 뿐 야이로라는 이름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의 이름의 뜻은 히브리어로 ‘그(하나님)는 빛을 주신다. 그는 깨우치신다’입니다. 성경에는 등장인물의 이름을 통해 그사람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경우가 많은데 이 사건에서도 야이로라는 이름을 통해 그가 어떠한 사람인지 그의 정체성을 가늠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혈우병 걸린 여인의 상태를 한번 살펴 보기로 하겠습니다. 26절은 그 여인에 대해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말 성경에 “많은 의사들에게”로 번역되어 있는데 정확하게는 “의사들 아래서”로 번역하는 것이 더 적절합니다. 그러니까 의사들 밑에서 어떤 치료의 효과도 없이 12년을 보냈으나 치료는 커녕 그녀의 재정적인 모든 것도 다 없앴다는 말이지요.  또한 이 여인에 대해 알 수있는 정보는 회당장 야이로의 간청을 듣고 길을 가는 동안 수 많은 무리들이 따라갔으며 그 여인이 무리들 가운데 섞여 있었고 그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고 몸이 낫게 되었는데 제자들 조차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몰랐고 예수님과 그 여인 둘만이 중요한 일이 일어난 사실을 알았다는 점입니다.

마지막으로 회당장 야이로의 딸입니다. 그녀의 아버지 야이로가 예수님 앞에 나와서 발 아래 엎드리어 고쳐 달라고 간청를 할 때만 하더라도 살아 있었는데 예수님이 가시는 동안 그녀가 숨을 거두게 됩니다. 그 어린 소녀에 대한 정보는 그가 회당장의 딸로 열두살이었다는 것과 병을 앓다가 죽었다는 것 외에는 알려진 것이 없습니다.

본문 이해하기

성경해석의 기본적인 자세는 자신의 처지나 지금 현재 21세기에 이야기를 듣는 청중의 입장이 아닌 당시 이 글의 최초 독자의 입장이 되는 것입니다. 많은 설교자들이나 성경을 가르치는 분들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식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게 한 성경해석은 하나님의 뜻이 중심이 되기 보다는 인간들이 듣기 좋은 이야기로 흐를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많은 분들이 자신들의 가슴아픈 현실을 예수님이 해결해 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하는 내용으로 많이 이해되어 왔고, 이해되고 있는 것도 바로 그러한 잘못된 해석방식 때문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씨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시작한 예수님의 가르침의 하일라이트라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직전 예수님은 무덤가에 있는 군대귀신 들린 자의 귀신을 쫒아내는 이적을 보이셨습니다. 그리고다시 가버나움으로 오셨습니다. 21절~24절을 읽으십시오. 예수님이 오시자 큰 무리가 예수님에게 몰려들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바닷가에 계셨습니다. 그 때 회당장인 야이로가 예수님의 발 아래 엎드렸습니다. “내 어린 딸이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라고 말합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부탁만 들으면 아주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그는 자신의 열두살 배기 딸을 ‘내 어린 딸’이라고 지칭합니다. 유대인들은 열세상이면 성인으로 취급을 받는 것을 감안하면 성인이 되기 직전의 아이임에도 어린 딸이라고 말을 합니다. 이 표현은 자신의 힘으로는 어떤 법률적 행위도 할 수 없는 나이의 어린 아이를 말합니다. 그냥 법적으로 행위무능력자라는 의미이지요. 따라서 이들이 법적인 행위를 해도 무효가 됩니다. 결국 이 병든 아이는 자신의 힘으로는 어떤 것도 만들어 낼 수 없는 완전행위 무능력자인데다가 죽을 병까지 들었다는 말이 됩니다. 두번째, 회당장 야이로는 “위에 손을 얹으사”라고 구체적으로 치유 행위까지 지정합니다. 안수를 통한 초자연적인 치료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그가 주문한 것은 “구원을 받아 살게하소서”라는 말입니다. 물론 그가 생각하는 구원의 의미는 죽지 않고 병에서 회복되는 것입니다. 야이로는 한 번만 간구한 것이 아니라 여러 번 수차례에 걸쳐 예수님께 강하게 요청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이 재미있습니다. 24절을  읽으십시오. 예수님은 수차례의 간구를 들은 후에 아무 말도 없이 그와 함께 동행합니다. 아마도 야이로는 속이 타들어갔을 것입니다. 이왕 따라 나설 것이면 한번 부탁을 할 때 따라 나서지 않고 그렇게 많은 부탁을 들은 후에 그와 함께 길을 나서는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십니다. 여기서 많은 분들은 계속해서 예수님께 반복적으로 기도하면 예수님이 응답해 주신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왕 들어 주실 것이면서 왜 구하는 사람들에게 애타게 만드실까요? 예수님이 짖궂으셔서 그런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시간 때문입니다. 여기서 보여 주고자 한것은 치유가 아니라 부활이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후 야이로를 따라 그 어린아이가 누워있는 집으로 향합니다.

그런데 가는 도중에 문제가 생기고 맙니다. 바로 한 여인이 몰래 예수님의 능력을 가져 간 것입니다.  열두해를 혈우병으로 고생한 그 여인이었습니다.왜 예수님이 이 사건을 여기서 보여주셨을까요? 몇 가지 가정을 할 수가 있습니다. 첫째, 병고침의 본보기를 보여 주신 것이며 실제로 많은 분들이 이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고 나은 것처럼 믿음이 있으면 자신의 병이 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교회에 가서 매달리기도 하고 심지어 여기저기 치유사역자를 찾아 돌아 다니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전제는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특히, 이 글을 처음으로 읽은 로마교회의 교인들은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피를 흘리며 죽어갔으니까요. 두번째 가정은 원래는 이런 사건이 없었는데 비유로 적은 것이다라는 주장을 할 수도 있습니다 (실지로 그렇게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과학적으로 입능하기가 힘들다는 것이지요. 이런 가정 또한 일고의 가치도 없는 생각입니다. 하나님을 인간수준으로 생각하는 것이니까요. 이 사건은 실제로 있었고 그 생생한 기록이라는 점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세번째로, 실제로 이 사건이 일어 났고 이 사건이 당시 초대교회에 어떤 상징적인 가르침을 주었다는 가정입니다. 저는 이 세반째 가정을 지지합니다. 앞서 이야기 한 바와같이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 하나로 핍박을 견디며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간절히 원했습니다. 그런의미에서 예수님이 오셔서 이 여인을 고치고 죽은 아이를 살려 내는 모습은 당시 교회의 간절한 소망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25절~34절을 읽으십시오.  혈우병에 걸린 여인은 열두해 동안을 고생을 했습니다. 26절을 보면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로 되어 있어 이 여인이 수동적으로 당했던 것 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헬라어 원어는 능동태입니다. 이 여인이 자발적으로 많은 의사들 밑에서 고생을 했고 자신의 모든 것을 낭비했다는 말이 됩니다. 그녀의 병은 혈우병입니다. 유출병이라고도 합니다. 그렇다면 그녀가 의사를 찾아 다니고 돈을 지불하고 해도 어떤 해결책도 얻지 못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그것이 당시 일차 독자들에게는 어떤의미로 다가왔을까요? 특히 이 가르침의 전체 주제인 하나님의 나라와는 무슨 관련이 있는 것일까요?  어떤 사람도 이여인을 위로 할 수도 그녀의 병을  고칠 수도 없었습니다. 오직 이여인이 기다리는 사람은 온전한 회복을 시켜주실 한 분 예수님 뿐이었습니다. 마침내 예수님이 오셨고 이 여인은 고침을 받게 된 것이지요.

35절~43절을 읽으십시오. 그 여인과 이야기를 하는 동안 예수님의 발걸음은 더더욱 지체되었고 그 사이 어린 여자아이는 그만 죽고맙니다. 집으로부터 사람이 와서 회당장에게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니까?”라고 보고를 합니다. 이 말은 이제는 예수님이 오셔도 더 이상 의미가 없다는 말이지요 그러자 그 말을 들은 예수님이 회당장에게 “두려워 하지말고 믿기만 하라”고 말씀하시고 베드로, 야고보 그리고 요한만 데리고 그 집으로 들어가 아이를 다시 살리게 됩니다.

저자는 무엇을 말하려고 했을까?

이 질문에 대답하기에 앞서 이해를 돕기 위해 사도바울 이야기를 해보고자 합니다. 사도행전 16장에는 그가 유럽으로 건너가게 된 이유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게도니아 인의 환상을 본 그는 빌립보로 건너가 그곳에서 전도를 하고 데살로니가로 내려 옵니다. 데살로니가에서는 사람들의 극심한 훼방으로 단 세번의 설교만 하고 그곳에서 철수를 하여 결국 아테네까지 내려 오게되지요. 그런데 그는 자신의 전도를 받은 데살로니가의 교인들이 너무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디모데를 보내 사정을 알아 보기로 했습니다. 디모데로부터 데살로니가의 사정이야기를 들은 사도바울이 쓴 편지가 바로 데살로니가 전서입니다. 데살로니가 그리스도인들은 사도바울의 짧은 메시지를 듣고 예수님을 믿었으며 심지어 그들 가운데에는 순교자까지 나왔다는 말을 듣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죽어간 사람들이 어떻게 될 것이며 자신들의 미래 또한 너무 걱정이 되었던 모양입니다. 이에 대해 사도바울은 이렇게 편지를 하며 그들을 위로합니다.

13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14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15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 (살전 4:13-15).

사도바울은 이렇게 편지로 믿음 때문에 순교한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며 남아 있는 사람들을 위로하였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마가도 지금 로마제국의 극심한 핍박으로 인해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위로하고 그렇게 죽어간 그들이 예수님의 오심으로써 다시 살아날 것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열두해는 하나님의 때가 온전히 되었을 때로 해석하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물론 다른 해석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역사속에 개입하는 그날 자신의 모든 것을 다 허비하면서도 예수님을 간절히 기다리는 이 땅에 남겨진 예수님의 신부, 그 교회가 온전히 회복될 것이며, 주님을 믿으며 주님을 기다리다 끝내 그를 생전에 만나지 못하고 죽어간 성도들도 부활하여 예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마가가 당시 그리스도인들에게 전하고자 한 메시지였습니다. 물론 예수님이 공생애 기간 동안  앞으로 닥칠 환란과 회복을 미리 보여 주신 것이지요,

그리스도에 대한 간절한 소망이 있습니까?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힘들고 어렵고 고난이 닥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고난들은 전혀 해결되지 않을 수도 있지요.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수님이 인간의 역사에 다시 개입하는 그날, 그 모든 것은 회복되고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와 영원히 거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부활에 대한 믿음과 소망이 있는 사람들이고 그렇기 때문에 현재의 삶을 인정하고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B2B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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