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bruary 3, 2017 | by B2B Missions
로마서 서른다섯번째: 정죄의 권능 (2017-2-4)
#묵상 을 위한 #성경이야기 #scriptory
2017-2-4
오늘의 본문: 로마서 2장 3절
#로마서 서른다섯번째:정죄의 권능
 
남들을 정죄하고 서로를 향해 손가락질 해대고 있는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이야기를 이어간다. 오늘 본문은 연속되는 두 번의 수사적 질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바울의 수사적 질문은 “그것들을 행하는 자들을 판단하는 사람들과 그것을 행하는 사람들”에게 한 질문이다. 이들은 자신도 동일한 실수를 반복하면서도 자신의 잘못은 깨닫지 못하고 남들을 향해서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사람들이다. 흔히 하는 말로 ‘내로남불’이다.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말이다.
 
하나님 앞에서 죄의 경중은 없다. 앞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살인죄나 뒤에서 수군수군대며 흉보는 거나 하나님 보시기엔 동일한 죄다. 마찬가지로 동성애와 불효를 같은 비중으로 다루시는 분이 하나님이다. 최근 들어 개신교의 가장 뜨거운 이슈 중의 하나는 아마도 동성애일 것이다. 사실 예수님은 수많은 죄인들을 용서하셨다. 그야말로 예수님은 죄인들의 친구였던 셈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공생애 동안 놀랍게도 동성애에 관해서는 한 번도 언급하신 적이 없다. 반면에 예수님이 직접 금하신 것이 있다. 바로 이혼 문제다. 예수님은 아주 강한 어조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 지니라” (마19:6).라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오늘날 기독교는 이혼에 대해서는 너무도 관대하다. 성도들의 이혼율이 타종교나 무신론자들의 이혼율보다 결코 낮다고 할 수 없다. 심지어 교회에서 가르치는 직분을 가진 분들이 이혼하는 경우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하지만 이혼율이 높아진다고 해서 기독교인들이 피켓을 들고 광장으로 몰려나가 목소리를 높이며 이혼자들에게 저주를 퍼붓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둘이 한 몸이 될 것을 명하셨다. 그 명을 따라 연합된 것이 결혼이라면 그것을 나누는 것은 어쩌면 동성애보다도 더 큰 죄가 아니겠는가?
 
그런데도 오늘날의 교회는 동성애에는 가혹하고 이혼에는 관대한 자세를 보인다. 어떤 죄에는 엄격한 심판의 잣대를 들이대면서 다른 죄에 대해서는 관대하게 넘어간다. 이런 모습은 사실 이중잣대 아닌가? 인간에게 있어 죄는 피할 수 없는 숙명과도 같은 존재다. 그 죄는 인간 내면 깊은 곳에 웅크리고 있다가 자기 자신이나 타인이 자기 눈에 거슬리는 일을 하면 어김없이 스멀스멀 기어나와 그 위력을 발한다. 정죄는 행위나 상태에 대한 최종 판단이다. 그런데 행위나 상태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기준이 필요한데 이것이 바로 인간들이 가진 선악 판단 기준이다. 그것이 인간들로 하여금 죄를 인식하게 만든다. 성경은 그 선악 판단 기준을 율법이라 부른다. 사도 바울은 죄와 율법과의 관계를 고린도 전서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니라” (고전 15:55~56).
 
사도 바울은 율법->죄 -> 죽음으로 이어지는 연결 고리를 명쾌하게 한 문장으로 설명했다. 죄의 삯은 사망이다 (롬 6:23). 우리는 그 사실을 분명히 안다. 죄가 이 세상에 들어 오고 그 때문에 사망이 왔다 (롬5:12). 인간들은 누구나 죄를 짓고 사망을 경험한다. 하지만 사실 지금까지 인간들의 마음을 사로 잡고 뒤흔드는 것은 사망도 죄도 아니다. 그것은 바로 율법이다. 아담이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자 어줍잖은 선악 기준이 인간들의 마음 한가운데 들어와 새겨졌고 그것이 결국엔 인간들을 죽음에 이르게 만들었다.
 
사도 바울이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문제가 있다. 그것은 인간들의 행위가 아니라 그 행위를 판단하는 근거에 관한 것이다. 그게 바로 율법이고 인간들의 양심이다. 인간들이 하나님의 권한을 침해해서 가져온 선악 판단 기준, 그것이 모든 문제의 근원이다. 아주 쉬운 예를 하나 들어보자. 한적한 시골에 비포장 도로가 있었다. 그 도로는 왕복 2차선인데 차량 통행이 적어 계속 비포장 상태였다. 차들은 대충 어림잡아 오른쪽 길을 택해서 달렸다. 차뿐만 아니라 시골의 경운기와 자전거도 그 길로 다녔고 소를 몰 때도 그 길로 다녔다. 비포장 도로니 당연히 차선도 없고, 황단보도도 없었다. 시골 사람들이 그렇게 다니는 것은 전혀 불법이라 할 수 없다. 그들은 아무 거리낌 없이 그 도로를 이용했다. 그런데 그 주변이 개발되기 시작하면서 그 도로가 차들로 붐비기 시작했다. 정부는 그 도로를 왕복4차선으로 넓히고 아스팔트로 포장을 했다. 그리고 동네를 가로지르는 횡단보도도 설치했다. 물론 갓길이 있었지만 빠른 속도로 달리는 차들로 인해 가축들을 데리고 그 길을 가는 것은 매우 위험했다. 그 때부터 사람들은 반드시 황단보도 표시가 그려진 곳으로만 건너야 했다. 하지만 차가 오지 않을 때에는 예전처럼 무단횡단을 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물론 이는 교통 법규를 어기는 행위다. 어느 날 운 나쁘게 경찰에게 걸려 교통법규 위반 딱지를 받게 되면 그는 벌금을 내야 했다. 얼마전까지는 맘대로 다니던 길이었는데 길이 포장되고 횡단보도가 생긴 이후부터는 그게 불법이 되었다. 여기서 갑자기 생겨난 횡단보도가 바로 우리 마음 한가운데 있는 율법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율법은 자신도 횡단보도를 이용하게 만들뿐 아니라 타인들을 감시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자신이 급해서 그냥 건너면 어쩔 수 없이 그런 것이고 남들이 건너면 교통 법규 위반인 셈이다. 참으로 답답한 노릇 아닌가?
 
율법은 우리에게 와서 우리로 하여금 죄책감이 들게한다. 진정한 자유는 율법으로부터의 해방이다. 그런데 한 번 온 율법에서 헤어나는 일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부단한 훈련이 필요하다. 솔직이 내 안에 뿌리 깊이 박혀있는 판단 기준을 어떻게 인간 스스로 없앨 수 있단말인가? 그래서 율법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은 고통을 수반한다. 그런데 율법의 권능에서 점점 벗어날수록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 자유와 안식은 그만큼 늘어난다.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사랑의 하나님은 우리가 스스로를 향한 죄책감, 타인들을 향한 정죄과 비난의 칼날을 거두어 들일 때 비로소 체험하게 된다.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는다고 했지 않는가? 그러기 위해서는 내 안에 도사리고 있는 그 선악 판단 기준이라는 괴물을 무력화해야 한다. 그것만이 유일한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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