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bruary 2, 2017 | by B2B Missions
로마서 서른네번째: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사람들 (2017-2-3)
오늘의 본문: 로마서 2장 2절
하나님은 반드시 죄를 심판하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단순히 용서를 통해 인간과의 화목을 추구하시는 분이 아니다. 믿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착각하는 것은 ‘용서’에 관한 것이다. 인간 사회에서 용서란 잘못된 것을 없던 일로 덮어주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생긴 빚이라 해봐야 아무런 대가없이 채무 면제를 선언받은 고마움 정도일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용서는 그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하나님은 아무런 대가를 치르지 않고 거저 용서하지 않으신다. 죄에는 반드시 대가가 따르고 그 대가는 누군가가 반드시 치러야만 한다. 우리가 거저 믿게 되었다고 해서 하나님이 우리 죄에 대해 아무런 대가를 요구하지 않으신다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있습니다”라는 선언은 오늘 본문의 핵심이다. 문제는 우리가 믿는 기독교의 핵심은 ‘하나님이 이미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심판하셨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인간은 모두 죄인이며, 스스로 자신의 죄를 책임질 능력이 없는 자들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인간을 대표하여 십자가에서 처형되심으로써 우리의 모든 죄가 사라졌다는 것이 복음의 핵심 내용이다. 그런 사실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도 바울이 왜 로마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다 “하나님의 심판이 있습니다”라는 말을 했을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하나님이 더 이상 심판하지 않으시기로 작정한 성도들인데 그런 그들이 서로를 향해 비난하고 비판한다면 바로 그 비난과 비판을 근거로 하나님이그들을 심판하시겠다는 말이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믿음으로 율법에서 해방되었다. 율법은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하나는 유대인들에게 주신 기록된 율법이다. 다른 하나는 이방인들의 마음 속에 있는 판단 기준이다. 한글 성경은 그 판단 기준을 ‘양심’이라 번역했다. 헬 라어 원어는 ‘수네이데시스’ (συνείδησις)인데 이를 직역하면 ‘함께 판단한다’라는 뜻이다.
 
유대인들에게 내려준 율법이든 이방인의 마음에 있는 양심이든 여기서는 통칭하여 모두 ‘율법’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율법은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이다. 그리고 무엇이 깨끗하고 무엇이 더러운지도 판단하게 해 준다. 인간은 누구나 예외없이 자신들만의 율법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성경에 기록된 율법이든 마음에 주어진 양심이든 상관이 없다. 그 율법은 각자의 행동의 지침이 되고 그것으로 인해 스스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선악을 구분하게 된다. 그래서 자신의 행동이 그 기준에 미달하면 스스로를 정죄하고 죄책감의 수렁에서 헤어나오지 못한다. 사람이 수치심을 느끼는 이유도 바로 마음 안에 있는 ‘율법’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율법은 인간으로 하여금 어느 정도는 선을 행하고, 옳은 일을 하며, 정결한 마음을 갖는데 도움을 준다.
 
문제는 율법이 늘 그렇게 선한 쪽으로만 쓰이지 않는다는 데 있다. 인간의 내면에 체화되어 있는 율법은 정죄의 수단이 되기 십상이다. 그 율법을 가지고 선을 행하는 게 아니라 남을 비방하고 판단하기 시작하면 율법은 이미 선한 것이 아니라 악한 흉기로 둔갑해 버린다. 율법 그 자체를 만드시고 인간들에게 내려 주신 하나님조차 그 율법을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문자 그대로 적용하지 않으셨다. 우리들 대신 예수 그리스도를 희생양으로 삼으시고 그 피로 힘입어 우리를 거룩하다 하신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거룩하다 하시고 하나님이 받아 주신 사람들을 누군가가 정죄하고 비난하고 심지어 죽어 마땅한 자라고 매도하고 있다면 그는 아직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지 못한 자다. 하나님의 온전한 용서를 경험한 사람은 자신이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었다는 사실을 체험한 사람이다. 그런 사람들은 기독교를 단순히 이론이나 머리로 이해한 사람이 아니라 삶 속에서 자신이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그 안에 머무르고 있는 자들이다. 그런데 자신은 용서받았다고 하면서 하나님이 용서하신 타인은 용서하지 못하고 있거나, 또는 하나님이 용서하신 자신을 스스로가 용서할 수 없어 자괴감에 시달리고 있다면 두 경우 모두 아직 하나님의 진정한 사랑 안에 있지 않는 증표라 할 수 있다.
 
베드로는 용서에 대한 복음을 선포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이렇게 질문했다.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 하오리까?” (마18:21).
 
그러자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이렇게 대답하신다.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이라도 할지니라” (마1:22).
 
이렇게 말씀하신 예수님은 그 의미를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만 달란트 빚진 종의 이야기를 꺼내셨다. 그 종은 갚을 것이 전혀 없는 빈털터리였다. 다만 얼마라도 빚을 돌려받으려고 생각한 주인이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고 명령했다. 그러자 그 종은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다”라며엎드려 간곡하게 호소했다. 그러자 이를 불쌍하게 본 주인은 그의 모든 빚을 탕감해주고 그를 석방해 주었다. (마18:23-27). 여기까지가 구원의 의미를 설명한 부분이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다. 주인의 은혜로 풀려나 자유의 몸이 된 그는 길을 가다가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사람을 만났다. 그는 다짜고자 그의 멱살을 잡고 자신에게 진 빚을 당장 갚으라고 협박을 했다. 뒷이야기는 하지 않아도 다 알고 있으니 생략한다. 다시 베드로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으로 돌아가 보자. 예수님은 용서는 절대로 자신의 권리 포기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고 말씀하고 있다. 권리 포기 없이는 진정한 용서를 체험했다고 할 수 없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은 한 번도 율법으로 판단할 권한을 주신 적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는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까지 정죄하고 비난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권리를 넘어서는 행위다. 다시말해 월권이다. 인간의 조상 아담은 하나님처럼 된다는 나하스(뱀)의 말에 넘어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먹었다. 그 때부터 인간은 하나님의 고유 권한을 자기 것인양 마음대로 휘둘러댔다. 구원은 인간이 불법적으로 가지고 있던 선과 악에 대한 기준을 다시 회수해가는 과정이다. 그렇기에 인간에게는 자신을 포함하여 어느 누구도 비판하거나 정죄할 근거가 없다. 근거가 없는데 어떻게 정죄하고 판단하겠는가? 당신은 어떤가? 혹시라도 당신 마음 속에 자기 자신 또는 타인을 용서하지 못하고 쌓아둔 뭔가가 있는가? 당신이 그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혹시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욕망이 여전히 당신 안에 가득하기 때문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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